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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떠도는 조선인과 한설야의 '과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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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한설야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灰色)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허연 북조선(北朝鮮)이 보이느니."

조선인의 간도 이주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1924년, 김동환이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아무리 북쪽 나라라고 해도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릴까. 하물며 여기서 말하는 북국이란, 조선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만주의 간도가 아닌가. 그곳에도 짧지만 여름이 있고, 봄이 있을 텐데 시인은 그곳을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는 끝없이 추운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가 조선을 떠나 중국 북방인 간도로 이주한 조선 이주민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과장된 표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자들의 마음에서 보자면 이국땅은 언제나 겨울처럼 추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조선인 이주민이란 조선 땅에서 먹고살 것이 없어 먼 이국땅까지 밀려간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수년이 흐른 후 그들이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제비가 가는 남국(南國)'이라며 그리워했던 조선은 더 이상 그들 기억 속의 고향은 아니었다.

한설야의 '과도기'(1929)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간도 이주민의 삶을 다루고 있다. '과도기'의 주인공 창선은 삶의 터전을 찾아 간도로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도착한 간도는 일본의 선전처럼, 주인 없는 땅이 지천에 널려 있는 기회의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웠던 간도 생활을 접고 4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고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후였다. 고향이 있던 자리에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고향을 잃고 표박(漂迫)하는 사람이 어디 '과도기'의 창선 한 사람뿐이었을까. 식민지 시기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을 떠나서 간도로, 상해로, 하얼빈으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이국땅을 떠돌고 있었지만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점에서 모두 같았다. '조선적' 기억과 기록이 소멸된 '식민지 조선'은 단지 일본제국의 한 변방 지역에 불과할 뿐 그들 모두가 기억하는 고향, 조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인 김동환이 희구한 따뜻한 '남국'(南國) 고향은 이미 조선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식민지 경험에는 이처럼 전통과 기억의 단절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식민지 시기 36년 동안 전통에서 단절된 채 먼 이국땅을 표박하던 정신적 이주자의 후손이 바로 지금의 우리가 아닌가. 식민지를 경험한 치욕의 역사에서 벗어나는 길이 일본의 사과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스스로 오랫동안 단절된 기억과 전통을 되찾아 복원할 때 욕된 식민지 경험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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