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의 향기]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여정 지음/ 민음사 펴냄.

이성과 질서, 통념과 상식에 익숙한 독자가 읽어볼 만한 시집이다. 대구 출신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여정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즉 하나의 액자에 내가 여럿 들어 있다. 그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추상화는 붓질과 색감, 빛의 밝기 정도로 다가온다. 그러나 작가와 그 시대를 이해하면 붓질과 색감 너머에 어른거리는 상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정의 시는 그림으로 치자면 추상화에 가깝다. 시대를 품고 있는 추상화라기보다는 시인 자신을 품고 있는 추상화라고 해야 하겠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고 있다. 내 귓속에 물이 차오르고 있다. 박쥐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이 길은 언제나 스텐(Stainless)이었다. 비틀어도 비틀어도 잠겨지지 않는 날들이 또독또독 다가오고 있다. 밤이 와도 해는 지지 않았고, 먹구름이 몰려와도 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비가 내려도 대지는 타들어만 갔다.-'불면' 중에서-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들리는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고요 속에 귓속까지 파고드는 굉음은 겪지 않고는 공감하기 어렵다. 잠이 달아난 몸은 사막과 같고,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살점과 같음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비가 와도 대지는 젖지 않고, 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는 데서 '살아있는 나를 죽은 나와 분간할 수 없다'는 시인의 사정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독자에게 여정의 시는 '파괴적' 으로 와 닿는다. 웬만큼 성질 괴팍한 사람도 이런 식의 화법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아내나 연인은 때때로 억지를 부리지만, 스스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시인 여정은 '그 알고 있기를' 부정한다. 184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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