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예던길을 이어 걸을 수 있는 안동 도산면 원천리 왕모산성 길. 퇴계 선생은 왕모산의 경치에 감탄해 '응당 이곳이 복지인 줄 알고서 짐짓 신령스러운 벽을 두어 높은 산을 눌럿도다'라는 시를 남겼다. 이 산 솔숲 오솔길 곳곳에는 750여 년 전 공민왕 파천의 한이 스며 있다. 퇴계 선생이 거닐었던 예던길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일제에 강제로 빼앗긴 울분을 시로 표현했던 육사 선생의 항일의 혼이 스며 있다.
숱한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르며 역사의 아픔과 민족사의 혼을 배우고 내려갔다. 또 아름다운 풍광과 절경에 감탄했다. 키 낮은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봄 향기 머금은 바람에서도 수백 년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는 듯하다.
◆공민왕의 고뇌, 왕모산성과 왕모당
청량산은 낙동강을 따라 아래로 30리를 내달리다 왕모산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산자락은 강과 어우러져 물돌이 형국의 내살미를 만들고, 또 한쪽으로는 건지산 줄기들이 내려와 아름다운 원천리 들을 형성해 놓고 있다.
왕모산 오르기는 내살미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원천교(천곡교)를 건너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한눈에 드넓게 펼쳐진 천곡(내살미)의 속살이 드러난다. 이 마을은 원천에서 가장 큰 마을로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이 마을 모래사장도 예안 14곳 가운데 8곡으로 아름다운 '천사미'(川沙美)라 불린다.
왼편으로 주차장과 왕모산 오르는 길이 나온다. 초입에 들어서니 키 낮은 솔숲 오솔길 사이로 봄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수백 년 역사 속으로 발길을 들여 놓은 셈이다. 1361년 고려 31대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과 왕모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란 왔을 때 공민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피신시키면서 축성한 성이 있는 곳이다.
성의 총길이는 360m쯤 되지만 지금은 50m가량 흔적이 남아 있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으나 산 정상에서 주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다.
왕모산을 오르다 뒤돌아 내려다보는 원천리 물돌이 마을은 마치 들과 강물이 한데 어우러져 한옥의 처마를 그리듯, 한복 버선코의 곡선미를 보이듯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속세에 찌든 가슴이 탁 터지면서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성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낙타 안장처럼 푹 빠져 바람을 막아 주는 곳에 성황당이 있다. 왕모당(王母堂)이다. 이곳에는 나무로 만든 남신상 1구와 여신상 1구가 있으며 그 뒤 벽에 '왕모산성 성황당'이란 글귀가 걸려 있다.
최성달 작가는 "왕모산은 '오가산지'(吾家山誌), '선성지'(宣城誌) 등 옛 문헌에서 '고세대'(高世臺)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비록 산은 낮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수십 리 밖의 모든 사물의 움직임과 산천지형을 한눈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편(敵)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 요새다"고 했다.
◆이육사의 울분, '절정' 노래한 갈선대
왕모당을 지나 깎아지른 듯 가파른 산을 옆으로 돌아 오르면 '갈선대'(葛仙臺)가 나온다. 김휘동 전 안동시장은 사랑방 38호에서 이곳을 비유해 "단애의 절벽에 드렁칡이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모습처럼 치렁치렁 드리워져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갈선대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는 경이롭다. 이 지역이 낳은 시인 이육사의 생가터와 문학관이 아련하게 보인다. 이곳 갈선대(칼선대라고도 불린다)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감탄하고, 육사 선생의 나라 잃은 울분이 가슴으로 전해오는 듯하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칼을 세워둔 듯한 모습의 갈선대는 민족시인 이육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의 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육사는 자신이 태어난 원촌마을이 아득히 바라다보이는 이곳에 올라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시로 표현했다. 갈선대 바로 밑 호젓한 마을은 단천(丹川)이다. 도산구곡 중 여섯 번째인 천사곡과 일곱 번째인 단사곡 물길이 태극 모양을 하며 마을을 휘돌아 삼남으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풍광이 가히 은자가 자연을 벗 삼아 한평생 도학을 이룰 만한 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겨울로 형상화된 암울한 시대에 독립과 저항을 노래했던 이육사의 연민이 가득 찬 일생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상념을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곳이지만 계단이 있어 수월하다. 솔수펑이와 암릉 지대를 몇 차례나 지났을까. 발은 어느새 왕모산 정상에 서 있다. 왕모산 648m로 표시된 철제 팻말이 깔밋하다.
정상에서 보는 조망이 탁월하다. 가슴을 뛰게 하는 감동 사이로 태극무늬를 반복하며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눈 아래 얼비친다. 남쪽에는 도산서원 뒷산의 마루금이 하늘로 기어가 가뭇없다. 북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멀리 바위 병풍을 두른 청량산의 실루엣이 한 폭의 동양화다.
◆도산서당 교육 발상지, 월란정사
왕모산 정상에서 삼계리 임도와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동문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과 10여 년간 수학하던 월란암(月瀾庵) 옛터에 후손과 후학들이 선조의 학덕을 추모해 건립한 '월란정사'가 호젓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월란'(月瀾)이라는 의미가 달빛이 여울을 아름답게 비춘다는 뜻이지만 월란정사에서 바라본 강물은 달이 아니라 물이 달빛을 희롱할 만큼 맑아 하늘빛을 띠고 있다.
이곳은 김사원이 22세 되던 해 퇴계의 문인이 되면서 10여 년간 공부하던 월란암 자리를 도평의공파 의성 사촌 김씨 문중에서 김사원의 학덕을 추모해 1860년에 세웠다. 이곳은 퇴계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퇴계는 간재 이덕홍, 금계 황준량, 매암 이숙량과 월란암에 들러 강학하기도 하고 주위 풍광에 취해 시를 짓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학들이 일명 '월란척촉회'를 발족했다. 요즘으로 치면 철쭉 문학동호회 같은 것이다. 400년 전에 매년 철쭉이 피는 봄날에 이곳에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니 부럽기만 하다. 지금도 매년 4월이면 이곳에서 학술대회가 열린다. 도산서당 교육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최성달 작가는 월란정사와 관련해 "천원 권 지폐 뒤 서당을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조선 산수화의 특징이 실경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경과 관념을 관통한 후 사의적으로 그린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에 서면 도산서당인지 계상서당인지 판가름이 난다"고 했다.
◆왕모산 가는 길 곳곳에는 역사'절경
안동시내에서 와룡, 도산 방면으로 35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다 한국국학진흥원과 경북도 산림과학박물관, 도산서원을 지나 고갯길을 넘으면 도산면사무소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산 아래로 난 포장길을 따라 돌고 돌면서 보이는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한 퇴계종택 뒤편으로 '퇴계 공원'이 새로이 들어서 퇴계 선생에 대한 모든 것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 2㎞ 남짓 가면 또 하나의 역사가 기다린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을인 상'하계 마을이다.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살았던 진성 이씨 집성 마을이다. 안동댐 조성으로 수몰지가 된 이 마을에서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 신하된 도리로 임금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을 단식순국으로 죽어가면서 그 정신을 후세에 알려 전국적으로 선비들의 거센 항일운동을 이끌어낸 향산 이만도 선생을 비롯하여 25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마을 오른쪽 언덕 위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退陶晩隱眞城李公)이라 쓰인 퇴계 선생의 묘와 '죽어서도 모시겠다'며 시아버지 묘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맏며느리 금씨 부인의 묘소가 앞뒤로 있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마을을 지나 고갯길을 올라 보면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의 혼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육사 선생의 고향인 원천마을에는 육사문학관이 들어서 선생의 시혼을 후대에 알리고 있다. 이 마을은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거닐면서 말을 매어 두었던 곳이다. 단사리의 병풍 같은 바위와 그 밑을 감돌아 흐르는 맑은 물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온다. 단사마을의 아름다움에 취하다 보면 눈앞으로 절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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