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주의 시와함께] 스미다

위선환(1941~ )

밤이었고, 당신의 창밖에도 비가 내렸다면, 그 밤에 걸어서 들판을 건너온

새를 말해도 되겠다

새는 이미 젖었고 비는 줄곧 내려서 빗발이 새의 몸속으로 스미던 일을,

깊은 밤에는

(중략)

새 안에 고이던 빗소리며 고여서 새 밖으로 넘치던 빗물과 그때 전신을 떨며

울던 새 울음에 대하여도,

(부분. 『두근거리다』. 문학과 지성사. 2010)

봄날 오후, 계단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빛을 쬐면서 빛 속에 스미고 있다. 계곡이 산에 스며 있듯이, 구름이 땅에 스미는 시간이 오고, 바람이 새에게 스며들어 저녁의 방향이 된다. 시인은 저녁이면 밭에서 골라온 단어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울면서 삶에 스미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말한다. 시가 흩어질까 봐 시인은 밤엔 새들이 손금을 물고 날아가길 바란다. 손바닥에 지문이 잠시 스며 있듯이 그때 운명은 초라할 뿐이다. 삶 속에 삶을 숨기는 일이 우리의 일이라는 듯이, '스민다'라는 말은 어디 가서 쌓이지 않는다. 음악 속에 소리가 스며 있듯이, 빛 속에 그늘이 스며 있듯이, 사람이 스밀 때 인간의 골짜기에는 가장 깊은 빛이 쌓인다. 계곡은 아픔이 맑을수록 견고하게 사람의 황무지를 숨겨준다. 누군가 누워서 천천히 물에 스미는 꿈을 꾸고 있다. 수천 개의 산이 그의 몸에 스며 있다. 부서진 손금처럼 살아가는 새에게 잠시 스미기로 하는 저녁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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