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맥수지탄(麥秀之嘆)

학교에서 문학사를 배울 때 현존하는 고대 시가로 '공무도하가', '황조가', '구지가' 세 작품이 있다고 배운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 넓은 지역으로 퍼지다 보니 시간이 오래 지나면 작가도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적마저도 모호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의 한류 음악이 나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록도 하지 않고, 즐기지도 않는 반면 베트남 사람들이 즐기고 잘 기록해 두었다면 그 음악들은 베트남 음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 있는 '황조가'나 에 있는 '구지가'는 국적 문제가 없지만, '공무도하가'는 전해져 오는 자료들이 모두 중국 측 사서들이기 때문에 항상 논란이 된다.

한치윤은 에서 중국 측의 사서를 인용하여 '공무도하가'를 우리의 역사로 분류해 넣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땅인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공무도하가' 이전에 있었던 우리의 노래로 한 작품을 더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자가 불렀다는 '맥수가'(麥秀歌)이다.

보리싹은 우거져 있고/麥秀漸漸兮

벼와 기장 무성하게 뻗었네/禾黍油油

저 교활한 어린아이는/彼狡僮兮

나와는 맞지 않네/不與我好兮

사마천이 쓴 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기자가 주(周)나라로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殷)나라의 옛 도읍터를 지나다가 궁실이 모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이에 기자가 몹시 상심하면서 맥수가를 짓고는 노래를 불렀다."라고 하며, '교활한 어린아이'가 은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紂)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달기라는 미녀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벌이던 잘못된 왕에 의해 수백 년 동안 탄탄했던 역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느끼는 탄식이 우리 역사로 보이지 않기도 한다. 기자에 대해 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하였지만, 반고가 쓴 《한서》에는 "기자가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왔다."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평양에는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崇靈殿) 옆에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崇仁殿)이 있었는데, 이덕무가 숭인전을 보면서 지은 시에는 기자는 은나라의 종친이었으므로 의리상 무왕의 봉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니, 반고의 견해가 옳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기자는 민족의 개념이 약하고 중국과 세계관을 공유하던 시절, 우리나라로 이주해 와서 나라를 잘 다스려 조선시대까지는 사대부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지은 '맥수가'를 우리의 노래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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