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묘사'는 지금의 경주시 성건동 남천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던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즉위 4년째 되던 해인 635년에 창건했다. 그 규모가 어찌나 뜨르르했던지, 절 안에 봉안할 장육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을 만들 때 온 성안의 남녀가 진흙을 나누어 운반했으며, 당시 불렀던 노래는 몇백 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영묘사에는 이상하게도 불이 잦았다. 문무왕 때 네 번, 성덕왕 때 한 번, 무려 다섯 번이나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묘사의 불을 문무왕이나 성덕왕이 아니라, 선덕여왕과 결부시켰다. 절과 절을 세운 사람은 깊은 인연으로 묶여 있다는 불교식 해석에서 비롯됨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심화요탑'(心火繞塔)이라는 설화가 탄생했다. 풀이하면 '마음의 불이 탑을 맴돌다'가 되겠다.
내용은 지귀라는 한 역졸이 감히 마음에 여왕을 품은 일이 화근이 되어 죽어간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지귀가 여왕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마음이 어찌나 요란했던지 결국 여왕을 만날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 자신의 부주의로 그 기회를 놓치고는, 심화(心火)가 일어 불에 타 죽은 후 불귀신이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민심이 화재에 대한 공포로 동요하자, 여왕이 술사에게 명해 벽마다 주사(呪詞)를 붙여 그 불을 막게 했다. 그런데 지귀가 죽은 자리가 하필 탑 아래여서 심화요탑인 것이다.
이 설화가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 보면, 당시 신라인들이 선덕여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몇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첫째, 여왕은 자애로운 통치자였다. 아무리 자신에 대한 사랑이 깊다고는 해도 한낱 미천한 역졸일 뿐인데, 친히 만나보겠다고 긍휼을 베푸는 모습을 통해 평소 백성을 대하던 여왕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여왕은 강력한 군주였다. 비록 '술사'라는 대리인을 통하기는 했어도 귀신마저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백성들이 여왕에게서 느낀 권위의 크기가 얼마만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여왕은 외로운 여인이었다. 물론 여왕은 기록에 따라 배우자가 없다고도 하고,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했다고도 하는 등 다르게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애정이었든 정략이었든 여왕은 분명히 혼인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의 눈에 비친 여왕은 분명 외로운 여인이었다. 그래서 지귀를 등장시켜 가없는 사랑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맨 위로 향하는 가장 밑바닥의 응원과 지지 말이다. 그것이 역졸 지귀가 대표하는 민심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해주고 싶은 여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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