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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흉터의 지리학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모든 사람이 그저 지나치기만 하는 경유지로 쇠락해버린 경관을 지나가다 보면, 어딘가 의미 있는 장소를 향한 갈망을 느끼게 되곤 한다. 장소에 관한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다. 이-푸 투안이 '토포필리아'라 말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환경은 깊은 정과 사랑의 대상이자 기쁨과 확실성의 원천이다. 환경은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들에게 세계관을 이루는 연결고리가 된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속도가 군림하게 된 세상에서는 '장소의 특별함에 대한 무관심'이 늘어난다. 과잉 이동의 시대에, 장소에 대한 사랑은 마치 구닥다리인 것으로, 심지어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예전에 다녔던 레코드점, 책방 등은 인터넷 사이트와 대형문고에 의해 밀려나고, 그 시절의 기억은 머릿속에서만, 운이 좋으면 그 기억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겨우 살아남는다. 어떤 곳들은 레코드나 책 등으로 어느 정도 기억해낸다지만, 아예 사라져버린 것들은 도통 떠올리기 쉽지 않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곳들처럼, 꿈에서 본 것처럼 흐릿해진다. 그 장소로부터 분리되는 상실감은 우리에게 일종의 상처를 준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이자 기억의 축적물인 장소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 친구는 어릴 적 갑자기 가난해진 집안 사정으로 이곳저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힘들게 지내야 했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할 틈도 없이 이사를 반복하면서 일종의 의식을 치르게 됐다고 했다. 이사를 가기 전 살던 집 벽이나 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그곳에서의 기억들을 빠짐없이 노트에 적어뒀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고, 기억을 더듬어 다시 찾아간 그 집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졌고, 대개 아파트로 바뀌어 있었다. 기억을 이을 단서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왜 자꾸만 오래된 것들에 눈이 머물고, 영상을 통해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게 잡아두고 싶었는지 스스로 되묻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렇게 도달한 곳은 그녀 자신의 기억 속이었다.

상처 한 번 안 난 어른이 없듯이, 이 도시도 그럴 것이다. 상처는 때론 흉터를 남기지만, 그 흉터는 오히려 어떤 상처가 회복된 증거가 된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겹에 걸쳐 쓰인 이 도시는 우리 각자의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기억과 망각의 텍스트가 된다. 그래서 도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뭉쳐진 원고지들을 한 장씩 한 장씩 벗겨내며 읽고 해독하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상처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생채기와 통증을 치유하고 아물게 하는 기술이 바로 '흉터의 지리학'이다. 앞서 이야기한 그 친구는 어릴 적 잃어버린 기억의 장소들에 대한 상실감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애도의 방법을 찾아냈다. 그녀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자신과 같은 이들이 기억상실증에 빠지지 않는, 기록이 남는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그녀는 앞으로 또 어떤 층위의 도시를 읽고 해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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