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무능하든 후안무치하든

"나쁜 사람은 아니다.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큰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고 평가받는 정치인이 있다. 제29대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의 이야기다.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 조사에서 늘 선두에 서는 사람이다.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의 무능력자'라는 게 이유다.

지나친 야심 때문에 '여공작'으로 불린 이혼녀와의 결혼이 정치판에 뛰어든 계기였다. 하딩의 뛰어난 대중 연설 능력도 한몫했다. 오하이오 주지사를 거쳐 연방 상원의원이 됐지만 하딩은 임기 6년을 허송세월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의회에 나간, 불성실한 정치인이었다.

당시 집권 민주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공화당이 정권을 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공화당 후보 경선이 과열돼 후보 결정이 어려워지자 공화당 핵심부는 만만한 하딩을 대선 후보로 밀었다. 하딩의 거절에도 당은 그를 채근했고 결국 당선됐다.

그는 자질이 없었다. 지도력도 위기관리 능력도 없었고, 도덕성과 인사관리는 더욱 엉망이었다. 포커 친구를 비서로 임명하는가 하면 '오하이오 갱'으로 불린 측근들은 부정부패로 원성이 높았다. 그러다 하딩은 1923년 재임 중 죽었다. 계속된 경제난에다 국정 난맥상으로 후임 대통령 쿨리지와 국민에게 큰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가 아직도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탄핵심판의 수레바퀴가 바삐 굴러가고 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24일을 최종 변론기일로 확인하면서 탄핵심판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아직 일정이 유동적이지만 박 대통령 입장에서 이번 주는 분명 '운명의 한 주'다. 탄핵 인용을 바라는 많은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3월 13일 이전에 인용과 기각, 양단 간의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데 무게를 싣고 있다. 그제 한 일간지 여론조사를 보면 '3월 13일 이전에 결정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78.1%로 나타났다. '그 이후에 결정해도 된다'는 16.6%였다. 국민 10명 중 7명 넘게 헌재의 조속한 판단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변수가 없지는 않다. 이른바 '태극기 민심'에 기대어 박 대통령의 "억지로 엮었다"는 주장에 동정론을 보태고 용을 쓰는 일각의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의 국민이 여전히 '촛불 민심'에 가깝다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물론 막판 뒤집기가 힘들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앞으로 보름 남짓 탄핵 정국의 흐름이 어떻게 변하든 국가 전체에 큰 멍자국을 남길 것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금 5천만 국민은 피곤하다. 몇몇 사람의 '악한 행동' 때문이다. 안 건드린 데가 없는 무한 욕심이 사단을 불렀다. 마키아벨리는 '악한 행동은 그 상황을 통제하지 않는, 신뢰할 수 없는 지도자에 의해 야기된다'고 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몰랐다"는 박 대통령의 말이 진실이라고 쳐도 주변에서 일어난 추악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대통령의 책임이다. 유무죄는 헌재와 법원이 가리겠지만 지금까지 특검 조사에서 드러난 정황들은 대통령의 허물이자 국가의 어두운 그림자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국회 측 대리인단을 이끈 김기춘 의원은 지도자가 감내해야 할 책임을 직접 자기 입으로 확인했다. 그는 "공직자의 지휘'감독은 물론 부정'비리를 막지 못해도 탄핵 사유"라고 말한 바 있다. 사견이나 소위 '법꾸라지'의 발언임을 감안하더라도 법을 날개로 온갖 요직에 두루 몸담은 고위 공직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에는 뒤통수가 당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박 대통령의 도덕성과 능력에 대해 많은 국민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판단의 추는 이미 기울었다.

박 대통령 주장대로 '완전 엮인' 대통령으로 후세에 동정을 살지, 아니면 무능하고 고집만 센 대통령으로 기억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문득 하딩이 차라리 속은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등 떠밀려 대통령이 됐으니 모두 내 책임은 아니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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