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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의 에세이 산책] 성조기와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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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버릇 개 못 준다.' 불쑥 꺼내고 보니, 개에게 미안한 말이다. 개가 이런 욕을 들어야 하는 까닭은 딱 하나다. 사람에게 빌붙어 살기 때문이다. 그 탓은 사람에게 있지, 개에게 돌릴 일이 아니다. 우리 먼 조상들이 야생 강아지를 억지로 어미 품에서 떼어내 거두어 먹이면서 길들였을 테니, 살려면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 수밖에.

'미당'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에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남으려고 애쓰다 등 떠밀려 '내선일체'(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은 한몸이다)를 부르짖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일본이 벌인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으라는 시까지 발표한 사람이다. 그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미귀축'(英米鬼畜)에 맞서서 싸움터에 나가 싸우다 죽은 우리의 오장을 기리며 이 사람을 본받으라고 한껏 부추겼던 이 시인은 나중에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미국이 이기자,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꾸어 이 땅을 점령한 나라 '미국 만세'를 부르게 된다.

힘센 놈에게 기대 종살이를 하다 보면 '노예근성'(이 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센진'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 민족성이 본디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비웃음을 담아 널리 퍼뜨린 말이다)이 생겨서, 다른 더 힘센 놈이 나타나면 그놈에게 빌붙어 사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 시인은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그 '미당'이 아직까지도 이 남녘 땅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미당 현상'이 우리 눈앞에 다시 민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탄핵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 사람들이 손에 든 태극기보다 수십, 수백(어쩌면 수천) 배 더 큰 성조기(아메리카합중국 국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혹시 "당신네 나라에 열심히 종살이 해 온 우리를 가엽게 여겨 '탄핵 반대'를 외치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라는 뜻이 펼쳐든 그 성조기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이것은 하루바삐 걷어내야 할 아주 나쁜 '종놈 버릇'(노예근성)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성주 군민들은 갖은 불이익을 견디면서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고 있다. 이 목소리를 쉽게 '지역 이기심의 발로'라고 깔아뭉개려 들어서는 안 된다. 평화 발자국 떼기의 어려운 한걸음으로 여겨야 한다.

전쟁광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러시아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맞설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 남녘과 북녘이 손을 잡고 한목소리로 '영세중립'을 외치는 길이다. "다시는 너희 입맛대로 이 땅을 전쟁터로 만들 꿍꿍이 수작을 부리지 마" 하고 분명하게 우리 뜻을 드러내는 길이다. 그러지 않으면 성조기 다음에 다시 이 땅에 일장기(일본 제국주의 국기)가 나부낄 날이 올지도 모른다.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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