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설] 저출산이 '고스펙' 여성 탓, 국책기관의 황당한 보고서

저출산 문제를 여성 탓으로, 그것도 여성의 고스펙'고학력 탓으로 전가하는 국책기관의 연구보고서가 나와 여론 몰매를 맞고 있다. 문제의 보고서는 지난달 2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개최한 제13차 인구포럼에서 한 선임연구원이 발표한 '결혼시장 측면에서 살펴본 연령'계층별 결혼 결정 요인 분석'이다. 보고서는 결혼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초혼 연령을 높이고 결혼시장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요인도 된다고 분석했다.

해결 방안으로 보고서는 채용 과정에서 '불필요한 스펙'에 불이익을 주자고 했다. 고학력'고소득 여성이 소득과 학력 수준이 낮은 남성과도 결혼할 수 있도록 사회규범과 문화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럴듯한 학술 용어로 포장돼 있지만 보고서는 "여자가 집안에서 솥뚜껑이나 운전할 것이지"라는 마초이즘의 연장 선상일 뿐이다.

시정잡배들이 술자리에서 하기에도 부적절한 소리를 국책기관이 공식 보고서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말문이 막힌다. 여성단체 회원들이 "정부야 네가 아무리 나대봐라. 내가 결혼하나. 고양이나 키우지"라면서 규탄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파문이 커지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이 유감을 표명하고 해당 연구원이 보직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행정자치부도 출산을 장려한다며 '대한민국 출신 지도' 서비스를 인터넷에 올렸다가 거센 비난에 직면한 바 있다. 저출산 문제가 국가적 재앙으로 다가오는 현실 앞에서 온갖 해법을 궁리해야 하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현실성 없는 대책을 불쑥불쑥 내던지는 당국의 자세에는 문제가 있다. 거기에 성 차별적 내용이 들어 있다면 결혼 및 출산에 대해 저항감만 더 키울 뿐이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며 정부가 2006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150조원 넘는 예산을 썼지만 저출산 문제는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공부에 매달리고 스펙을 쌓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채 여성을 아기 낳는 도구로 보는 인식이 남아 있는 한 저출산 문제 해결의 길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