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기억의 현장

겨울 끝자락에 아들과 싱가포르로 여행했다. 대학 진학 후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고, 제대하고 어학연수 등으로 떨어져 지내다가 모처럼 시간이 맞아 갑작스레 출발했다. 아빠가 함께하지 못해 못내 섭섭한 눈치지만 나야 일상을 벗어날 절호의 기회인지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나섰다. 아들은 겨울방학 중에 교환학생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과 학교 근처 숙소에서 생활하며 우리 문화를 알리고 안내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짧은 기간에 서로 꿈과 고민을 나누며 친해진 외국친구들, 그들과 다시 만날 약속을 해서 하루는 엄마 혼자 여행을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거듭 물었다. 아이 셋을 당당하게 키운 대한민국 엄마를 어찌 알고 이런 걱정을 하는지….

출발부터 귀국까지 특별한 계획 없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자정 넘어 도착한 '창이' 국제공항은 조명 탓인지 낯설었고, 한 무리의 단체 여행객이 빠져나간 이국의 대기실은 더운 나라에 미처 적응 못 한 피부처럼 바닥부터 번들번들 겉돌았다. 공항에서 도심에 이르는 길은 바다를 메워 건설된 동쪽 해안도로와 연결되어 밤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도시풍경이 신선했고 친절한 택시기사의 미소처럼 편안했다.

관광산업이 발달한 도시국가답게 외국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안내 표지판, 그때그때 가고 싶은 곳은 MRT(도시철도)와 버스, 택시를 이용하고 웬만하면 걸어서 이동했다. 현지 친구들이 추천한 곳도 구석구석 찾아서 보고, 듣고, 먹고, 즐겼다. 가족이 함께라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둘만이라도 떠나자. 타지에서 마주하며 동시에 느끼는 공감이란 단어,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단단함이 있다.

여행의 끝은 늘 그렇듯이 아쉽고 돌아갈 일상의 막연한 걱정으로 쉬 고단하다. 새벽 1시 30분, 출발이 지연되어 게이트가 제시간에 열리지 않았다. 서로만 믿고 조금 뒤에 확인한다는 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깜빡 잠이 들었다. 짧은 순간 안내 방송으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비몽사몽 내 이름은 지나쳤으나 다행히 엄마 귀에 걸린 이름, 부리나케 아들을 깨우고 신발 벗어들고 체면 따위 아랑곳 하지않고 달려갔지만, 자꾸 멀어지는 거리는 불가항력이었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는데 저 멀리 앞서간 아들이 전동카트를 타고 손을 흔들며 되돌아오는 영상, 믿을 수가 없었다. 공항직원의 도움으로 도착해 티켓체크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까지도….

늦은 탑승, 이전에 두어 번 목격했던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그날 내게도 일어났다. 이제껏 보살펴주던 엄마에서 보호받는 엄마로 역할이 바뀌는 자리, 내게는 소중한 기억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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