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윤리와 법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문제 중에 '카르네아데스의 판자'(Plank of Carneades)라는 것이 있다. 난파선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카르네아데스는 작은 판자 조각에 기대어 겨우 바다 위에 떠 있는데, 의지할 곳 없이 허우적대던 한 남자가 여기 함께 매달린다. 두 사람이 매달리기엔 턱없이 작은 판자였기 때문에 카르네아데스는 둘 다 빠져 죽을까 염려해서 그 남자를 밀어낸다. 이 경우에 카르네아데스는 살인자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기원전 2세기경의 스토아파 철학자 카르네아데스가 만들어 낸 이 사고 실험은 훗날 영국 법정에서 실제로 구현된다. 1884년 더들리와 스테픈스 사건(The Queen v. Dudley and Stephens)은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잡무원이었던 고아 리처드 파커를 살해하고 먹어버린 난파선 미뇨넷호의 세 선원에 대한 재판이었다. 한 명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파커를 죽인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당시 법정은 살인과 식인에 대해 일단 유죄를 선고했으나 선원들이 처했던 절박했던 상황을 감안, 특별사면으로 풀어준다. 법과 규율 이전에 생존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에서다. 당장 내 목숨 구하기가 급한 판에 체면이나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품위를 지키거나 거룩한 희생정신을 발휘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공에 뜬구름 잡는 소리일 것이다. 상황이 그러니 도리가 없다고 할 수밖에.

그런데 문제는 미뇨넷호가 겪었던 급박한 상황이 어느덧 우리의 일상으로 운위되는데 있는 듯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입장에서야 옆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먹을 것 하나 없는 망망대해 속의 조각배는 아니지 않은가.

이른바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 대한민국이 반드시 누군가를 약탈하고 희생시켜야만 유지되는 아비규환일 필요는 없다. 기실 우리 사회가 누리는 부의 총량은 단군 이래 최대요, 유사 이래 최고의 학력과 교육 수준 또한 우리 사회의 특징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치 못한 부의 향연은 '먹고살기 위해' 이웃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약자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공항이 미어터지도록 외유객들이 줄을 잇고, 길거리에 값비싼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가운데 절대적 빈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궁색하다. 단연코 우리는 인간의 품격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몰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이루어 온 경제적 풍요와 국격을 애써 폄훼하며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이들의 속내가 몹시 의심스럽다. 세계 10위의 국방비 규모에다 북한에 비해 40배가 넘는 국방비를 지출하는 나라에서 안보 타령으로 일체의 토론을 막아서는 태도는 어떠한가.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쥐어짜고, 원청 노동자가 하청 노동자를 외면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이 과연 생명을 위협하는 절대적 위기 상황 때문인가, 아니면 내 욕망의 높이를 돋우기 위해 타인의 생존권을 깔개로 쓰려는 수작 때문인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함께 탈 수 있는 좋은 배를 두고도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는 판자 조각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모두가 인간의 품격을 지켜낼 만큼의 부와 힘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고 아쉽게도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배에 태우려고 분투하는 형제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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