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은 어떻게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유지했을까?
신라사대계 발간 100일이 지났다. 석 달여 사이 신라인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가왔을까? 신라사대계 30권엔 쉬운 문장, 풍부한 사진을 통해 살아 있는 신라인이 담겨 있다. 이를 위해 역사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놀이나 여가활동 같은 분야도 포함하고 있다.
'놀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 수단이자 삶의 활력을 얻는 행동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람 간 교류는 사회운용 시스템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라인의 놀이에서 신라의 사회구조와 생활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인들은 대단한 안목을 가지고 놀이터를 선택했다. 울산 천전리 서석이 그런 곳이다. 이곳은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물줄기가 여러 차례 굽이쳐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이곳을 택하여 놀면서 바위절벽에 그림이나 각종 명문을 새겨넣었다.
그중 대표적인 글을 남긴 이는 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이다. 그는 525년 이곳에 놀러왔고, 그 뒤 14년 후 다시 찾아 예전에 같이 왔던 지몰시혜(只沒尸兮'갈문왕의 정비)를 추억했다.
이곳은 경주에서 배편으로 약 1시간 거리쯤 되는 곳이다. 그러니 들놀이꾼들은 아침에 왔다가 점심을 지어 먹고 해 질 녘에 돌아간 듯하다. 이들은 놀이 감상이나 함께 온 화랑, 승려 심지어 밥 지은 사람의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신라인의 들놀이는 아끼는 사람과 함께 자연을 호흡하는 행위였으며 동시에 어떤 기원을 담아 제사 지내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라 지도자들은 사영지(四靈地)를 찾아가 회의를 했고, 화랑들은 심심산천을 찾아 나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이를 통해 신라인들은 공동체 의식을 기르고, 자연에 대한 정보도 습득하며 신체를 단련했다. 봄철 김유신 종중의 부인들이 벌였던 재매곡의 꽃놀이 야유회처럼 부인들도 나들이를 즐기고 시회도 열었다. 그 방법은 어떠했겠는가?
연회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이 1975년 경주 안압지 못의 서쪽 호안에서 나왔다. 손에 쥐면 꼭 들어맞는 자그마한 14면 목제 주사위가 바로 그것이다. 신라 귀족들은 동궁에서 시 짓기 내기를 하고 나서, 그 승부에 따라 벌칙으로 14면 주사위를 던졌을 것이다.
벌칙은 시를 짓거나 노래를 시키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신체에 직접 가하는 벌도 있었고, 벌주(罰酒)를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인에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같이 꼭히 벌이라고 할 수 없는 규정도 있었다. 아마 사람들은 주사위의 특정한 면을 얻으려 노력하고 그 면을 얻었을 땐 환호했을 것이다.
한편 신라인들이 노동을 놀이로 승화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유리니사금은 길쌈대회를 열었다. 6부의 여성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7월 보름부터 한 달 동안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했다. 8월 15일 길쌈한 양을 심사하여 옷감을 적게 짠 편에서 이긴 편을 대접했다. 한가위의 기원이다. 길쌈이라는 노동에 팀과 시간 등 게임 요소를 부가함으로써 놀이로 승화시킨 것이다.
놀이란 타인과 어울리는 중요 수단이다. 또한 놀이를 통해 자신의 성취감을 맛보거나 연대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 속에는 자연히 생활수준, 사회구조와 그들의 사고가 배어 있다. 신라에는 김춘추와 문희를 만나게 했다는 축국과 같이 문헌에 나오는 놀이, 또 고니처럼 유물로만 전하는 놀이 등 수십 가지의 놀이 형태가 보인다. 놀이는 신라인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가장 신라인다운 신라인을 만날 수 있는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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