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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필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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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너무 많이 했더니 젓가락질을 못하겠다.'

어머니는 몇 년째 금강경을 필사하고 계신다. 아마 10번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칠순이 넘은 노인이 하루에 몇 시간씩 앉아서 글자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지하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하다.

나는 책을 참말로 지저분하게 본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릴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밑줄을 치고, 여백에 나의 말을 적고 싶어진다. 그 때문에 집에는 읽고 싶어 샀으나 읽지 않은 책과 지나치게 읽은 티가 많이 나는 책이 공존한다. 읽은 티가 너무 나는 책은 당연히 남에게 함부로 빌려주기가 어렵다. 얼굴이 뜨겁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새벽 감성 충만한 문장들이 책 사이사이에서 불쑥 나타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망하게 낙서하듯 책을 읽는 습관은 읽기와 쓰기를 중독처럼 하던 소중한 도반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도반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보면 밑줄을 긋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해당 페이지에 바로 적었다. 어떨 때는 책의 내용보다 자신의 낙서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곤 맘이 심란하여 도무지 일머리가 잡히지 않는 어느 날을 골라 모아 둔 문장과 낙서를 한글 파일로 정리했다. 그렇게 모은 글이 한 편의 글이 되고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라는 부제처럼 작가는 설레고 행복했던 문장과 그 문장이 낳은 낙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지금까지 책 한 권 써 본 적이 없다. 중학교 졸업을 끝으로 제대로 된 소설책 한 권 마음 편히 읽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디어진 손가락 근육을 주물러 가며 꾹꾹 눌러 쓴 글자 하나하나에 자신의 삶을 보태 딸에게 자신만의 불경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아마 그 이야기를 묶으면 한 편의 글이 되고,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우리 학교 아이들은 10월 대구 책축제에 전시할 책을 완성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원고를 다듬는 아이 곁에는 아직도 주제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아이들도 있다. 고졸에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던 은유 작가가 직업 작가가 될 수 있었던 힘은 언젠간 머나먼 지구 반대쪽을 여행하리라 마음먹고 쌓아둔 항공 마일리지 같은 빛나는 문장과 낙서 덕분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책읽기 방법이 있다. 필사는 가장 오래된 읽기의 방법 중 하나이며, 그 어느 것보다 성실함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글을 베껴 쓰는 고단한 시간이 지나면 나와 상관없던 글이 나만의 글이 되고, 더 나아가 나의 글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언젠가 저자가 될 수많은 그와 그녀들을 위해 이 가을 소중한 사람에게 필사 노트 한 권 선물하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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