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십 구문 반의 신발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가정」 중에서

시를 읽는 묘미 중 하나는 똑같은 시를 읽더라도 읽는 시점에 따라서 눈에 띄는 부분이 다르고 시에서 받는 느낌도 다르다는 것이다. 학생 시절에 이 시를 읽을 때는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이 '십 구문 반의 신발'이라는 부분이었다. 작가가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느끼는 책임감을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으니 가장 먼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엄격하고 호통을 치시던 우리 아버지와 자식들을 보며 미소하는 시 속의 아버지가 연결이 잘 안 되었다. 대신 나의 관심은 엉뚱하게도 '십 구문 반'이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470㎜, 한 짝은 235㎜였을 테니까 박목월 시인의 발은 참 작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읽어보면 시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강아지 같은 것들이 없었더라면 좀 더 여유 있게 살 수도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아지 같은 것들 때문에 힘이 난다. 막내둥이를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아버지 역할은 아직도 어설프기만 하다. 특히 예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십 구문 반의 신발'과 연결되는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이라는 시구는 더 잘 눈에 띈다. 자존심을 지키며 고고(孤高)하게 살고 싶은 맘이야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혼자라면 어디를 가든 큰소리치고 마음에 안 들면 판을 엎고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굴욕의 길도 감수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잘 대접받고 남들한테 인심 쓰면서 돌아다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외출은 나중에 힘겨운 청구서가 되어 가족에게 돌아온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굴욕의 길도 마다 않는 세상의 아버지들에게는 가족의 위로와 응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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