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그해 겨울

그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저녁 어둠이 땅에 깔리고 있을 즈음 한 노파가 현관 앞에서 서성거렸다. 통유리 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그렇게 남루한 옷차림은 아니었고, 보통의 노파처럼 단정한 모습이었다. 솜을 넣어 누빈 바지에 자주색 외투 속으로 보랏빛 스웨터를 곱게 입고 목도리도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닫힌 유리문을 열고 노파 앞에 멈춰 섰다. 노파와 마주 섰고, 눈도 맞추었다.

노파는 "참 부끄러운 부탁이지만 한 끼의 식사를 도와주었으면 해요"라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1천원을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내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노파는 이야기를 더욱 길게 늘어놓았다. "새댁, 나도 새댁 같은 때가 있었어.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였어. 나처럼 되지 말아야 해. 이 노인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길 바라고 싶어."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1천원짜리 두 장을 손에 얹어 주었더니 정말 고맙다며 인사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닮지 말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자식만 믿고 살았는데 이렇게 되었어…." 울먹이며 돌아가는 노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의 첫눈이 노파의 흰 머리에도 하얗게 내려앉던 그 겨울의 시작이었는데, 겨울의 터널을 어떻게 빠져 나올 것인지 가슴이 멍해졌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겨울만 되면 가끔 그 노파가 떠올랐고, 내가 노파의 나이일 때는 어떤 모습일지 아득한 미래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지금은 노인복지의 일환으로 기초노령연금이 나온다. 그 돈만으로 한 달을 버텨내기에는 형편없이 적은 돈이긴 하지만 안 받을 때보다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어떤 노인은 기초노령연금을 받으려고 재산을 다 자식에게 맡기고, 자신이 필요할 때 받아쓰는 걸로 약속했다고 하니 앞으로 피눈물 날까 걱정된다. 자식이 부모가 준 돈을 함부로 쓰겠냐마는 제 형편이 절박하면 쓰기 마련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서 제 자식 챙겨주기는 쉬워도, 부모 챙기기는 쉽지 않다. 부모 돈을 내 돈처럼 쓰다가 난리 난 집을 적잖이 봤다. 부모가 재산이 있다면 살았을 때 좀 주되, 자신이 있을 집과 생활비 그리고 인정을 나눌 지참금은 놔두어야 할 것이다. 기초노령연금을 안 받아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삶인가. 행여 그 연금에 혹해서 제 재산을 함부로 처리하여 백세시대에 노후를 걱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해 겨울, 한 노파를 만난 것이 나의 노후를 설계하는 이정표가 됐다. 인생! 그것은 수수께끼, 오늘을 진실로 살아내고, 내일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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