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미가 낳은 항일 의병장-왕산 허위] <5>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의병 봉기

을사조약 분개…전국 의병 뭉쳐 13도창의군 결성 잉태해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 의지를 다지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 의지를 다지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1904년 러일전쟁 이후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이르기까지 더욱 거세진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은 왕산 허위로 하여금 다시 항일의병운동의 선봉에 서게 만들었다.

을사조약 체결은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일제에 항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것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순종황제를 즉위시켰다.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민간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총포류까지 압류하는 등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김천시 지례면에 유배 가 있던 허위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전국 의병들과 연합해 항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 등 전국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상호연계하에 전개한 항일전은 전국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결성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허위는 항일행적이 빌미가 돼 1905년 1월 일본 헌병대에 구금됐다.

허위는 의정부참찬을 사임하고 석방이 됐다.

그렇지만 2개월 후 고종황제는 허위를 다시 불러들였다.

3월 2일 비서승원(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항일투쟁의 전력을 두려워한 일본은 의정부찬정 최익현(崔益鉉), 시종원경 김학진(金鶴鎭) 등과 같이 3월 11일 다시 허위를 감옥에 가뒀다.

투옥 전 일본은 항일투쟁을 중단하라고 허위를 압박했다.

그러나 허위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래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하고 일언지하에 일본의 회유를 거절했다.

허위는 일본의 각종 탄압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항일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완강한 허위의 항일의지에 일본은 하는 수 없이 7월 13일 헌병의 감호 아래 그를 귀향조치시켰다.

허위는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경계인 삼도봉(三道峰) 아래 김천시 지례(知禮) 두대동에서 일본 관헌의 감시하에 은거를 했다.

허위는 1905년 11월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들었다.

이때부터 허위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등 전국을 돌며 각지의 동지, 지사들과 항일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영남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郭鍾錫), 군부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던 참장 이학균(李學均), 전기의병을 주도하였던 유인석(柳麟錫) 의병장 등이 허위와 함께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또 허위는 경북 영천의 의병장 정환직에게 2만냥을 주고 의병을 모집할 것을 권유했다.

일본은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를 계기로 강력한 침략정책을 강행했다.

헤이그 특사는 소식을 접한 일본은 이등박문을 앞세워 대한제국 침략정책을 더욱 극렬하게 펼쳤다.

7월 20일 정미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마지막으로 장악을 하게 됐다.

이어 7월 24일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를 즉위시켰다.

일본은 국민들의 절대적 구심체이며 반일투쟁의 정점이었던 고종황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대한제국을 완전하게 장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8월 1일부터 서울의 시위대(侍衛隊·조선 말기의 국왕 호위 부대)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 진위대(鎭衛隊) 등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민간에서 보유하고 있던 무기류를 압류하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강행해 전 국민의 비무장화를 실시했다.

이것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의 무장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은 대일 적개심과 항일기운을 최고조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전 국민이 대일 전에 동참하게 되는 구국의 성전(聖戰) 의병전쟁으로 승화됐다.

◆헤이그 특사 빌미로 국권 빼앗아

일본은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을사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곳에서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했다.

그렇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종은 1907년 7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26개국 대표가 참석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이었다.

이들은 헤이그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 상을 폭로함으로써 국권회복에 열강의 후원을 얻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에 특사를 몰래 보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일봉은 고종을 감금하다시피 하고, 한국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방해했다.

특사 일행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특사 일행은 회의에 참석도 하지 못했고,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실패했다.

왕산 허위 선생의 의병활동지역.
왕산 허위 선생의 의병활동지역.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

을사조약의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전라도 최익현, 경상도 신돌석, 강원도와 충청도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는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평민 의병장이 나타나는 등 본격적인 의병 활동이 시작됐다.

허위도 일본의 국권침탈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의병전쟁에 참전해 그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9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인 연천과 적성, 철원 일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양주, 개성, 안협, 토산, 이천 등 경기 북부와 황해 남부, 강원 동북부 등지로 의병활동을 펼쳐나갔다.

허위는 의병을 모집해 전력을 강화한 다음 일본 군대와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게다가 친일매국노들을 암살하는 계획도 세웠다.

특히 9월 20일 철원읍 우편취급소를 공격하고, 인근 촌락에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도 했다.

철원읍 우편취급소를 공격할 때는 때마침 출장 와 있던 연천군 우편취급소장 종산창장을 비롯, 철원읍 우편사무원 원전신삼랑, 일본상인 강기길지조 등을 처단하기도 했다.

허위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연전연승을 했다.

철원읍을 습격한 뒤 300여 명의 의병들은 안현읍을 기습했다.

이어 마전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의병 1천여 명이 마전읍을 포위한 채 마전 주재 일본 군경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허위는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의병들을 포섭해,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펼쳤다.

이 처럼 전국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상호연계하에 전개한 항일전은 전국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결성하게 되는 씨앗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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