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박지성은 '언성 히어로'(unsung hero)로 통했다. 스포츠에서 자주 쓰이는 이 용어는 충분히 찬양받아야 함에도 찬양받지 못하는 '숨은 영웅'의 의미로 스타 대접을 받지 못해도 그 이상의 활약과 기여를 하는 선수를 가리킨다. 스포츠 외의 다른 분야, 그리고 지나간 역사 속에서도 많은 언성 히어로들이 있는데 석곡(石谷) 이규준 선생 역시 그러한 인물일 것이다.
포항 출신의 이규준(1855~1923)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의학자이자 유학자, 천문학자이자 문인이었다. 학문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 건축, 과학, 의학 등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처럼,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정치가, 외교관, 자연과학자로서 다채로운 삶을 산 것처럼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깊은 학문적 성취를 이뤘다.
그는 한의학자로서 두드러진다. 황도연, 사상체질 의학을 주창한 이제마와 함께 허준을 잇는 인물로 꼽히며 이제마와 더불어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약물 356종을 집대성한 백과사전 '신농본초'(神農本草)를 저술했고 중국의 '황제내경'과 허준의 '동의보감'을 '소문대요'와 '의감중마'로 재정리했다. 그는 또 중국 한방과 배치되는 독창적인 이론, 모든 병은 양기를 북돋워줘야 낫는다는 '부양론'을 주창했고 이는 후학들에게 전승되었다.
천문학자의 면모도 빼놓을 수 없다. 후학들은 서양 천문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수만년 후의 일월식을 다 맞히진 못하나 이규준의 수 계산법은 일월식 계산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높게 평가한다. 빼어난 문장과 작품들을 남긴 유학자이자 문인이기도 했다. 유학자의 소양을 지닌 의학자라 해서 '유의'(儒醫)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기성 유학자들의 권위주의적인 허세·허식을 배척하며 유학이 근본이념으로 회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당시의 풍토에 일침을 가해 사문난적으로 배척당하기도 했다.
삶의 발자취도 훌륭하다. 동해면 임곡리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동해면 석리로 이주해 살며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스스로 공부해 학문적 이치를 깨우쳤다. 그는 살던 지명을 따서 '석곡'이라는 호를 지을 만큼 소박했다. 나라 잃은 원인이 백성을 외면한 권력 때문이라고 지적했고 가난한 백성들과 다친 의병들을 치료하는 등 평생을 백성들과 함께했다. 그는 생전에 가난과 집안이 변변치 못해 스승을 얻지 못한 것, 혼란기에 태어난 것을 자신의 삶에 다행스러운 세 가지로 꼽았다. 어려운 여건을 오히려 삶의 동력으로 삼을 만큼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규준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포항의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과 이규준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낸 포항 출신의 동화작가 김일광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포항시도 최근 '석곡 인문학 축제'를 열어 향토 출신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을 널리 알리고 기리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진정한 지식인으로 살다 간 이규준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위대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앞으로 포항을 넘어 전국적으로 더 널리 알려져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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