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가 하나 둘, 시작되지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 떠나보내야 하는 동료들,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직장 선후배들, 그외 이런 저런 이유의 모임으로 저녁이 없는 삶을 보내다 보면 더 이상 송년은 조용한 성찰이 아니라 번다한 일이고, 잠 도둑입니다.
그렇잖아도 바빴던 날들에 더 바쁘고 더 정신없는 날들을 보태며 한 살을 먹기는 아까운 나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우렐리우스의 이 말을 자꾸 화두처럼 챙기는 모양입니다. "너무 많은 일에 쫓겨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된 까닭에 저녁모임은 가지 않지만 점심 모임은 종종 있는 편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 몇이서 일요일 점심으로 모였습니다. 집에서 음식 하나씩 해가지고 나눠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 모임입니다. 거기서 잘 나가는 남편을 둔 한 친구에게 대학생인 아이들과 성취지향적인 남편이 부딪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친구 남편은 휴일에도 빼곡한 골프약속으로 인맥을 관리하며 바쁘다는 사실을 성공의 바로메타로 여기는 스타일인데, 아이들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에 바빠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남편과 아이들과 마주치는 시간이 종종 생기면서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대부분을 잔소리로 채운답니다. 휴일 날도 늦잠 자는 꼴을 보지 못하고, 먹는 일부터 스펙 쌓는 일까지 체크하는 남편을 아이들이 왕따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남편이 그런다네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집안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그 남편, 사회적으로 잘 나가기 때문에 위기인 줄 모르는 거지만 삶의 위기인 거지요?
그랬더니 늘 바쁜 다른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는 너의 남편의 문제지. 우리 집에선 내가 그래. 자기들 교육비 송금하느라 밤낮없이 일하는 엄마의 노고는 아랑곳없고 지난 방학 때 나와서는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린,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고, 엄마와 느긋하게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어! 그런데 뒤통수 맞은 느낌인 거 아니? 아마 네 남편도 그럴 거야. 내가 번 돈 거의 전부를 송금하는데 그게 아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허방이라는 게 처음엔 기가 막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무서워지는 거야. 우리 친정집에선 아버지가 일벌레였거든.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일밖에 모르신다는 그것 밖에 없었어. 그런데 내가 내 아이들에게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그런 가족이 많지요? 일벌레인 누군가 덕택에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는 너무나 낯선 가족들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어머니,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최근에 아이들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대립과 싸움을 통해서도 서로의 마음에 다다를 수 있는 대화가 있고, 예, 알았어요,라는 수긍을 표현을 하면서도 마음을 닫아거는 대화가 있지 않나요?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당신만 믿는 일방적 잔소리 말고 서로에게 공감하며, 아니면 기분 좋게 대립하며 나눠가진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청춘도 없이, 꽃도 없이, 남의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 줄 믿고 열심히만 살아온 일벌레 친구들이 가장 가깝다 믿는 아이들의 불만과 반란을 등불 삼아 자기 생을 돌아보고 있는 거지요? 내가 추구해온 가치가, 내가 믿어온 삶의 양식이 허방인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살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리고 그들이 자기 삶을 찾아 떠날 때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고 믿어주면서 기분 좋게 떠나보내야 하는 거지. 앞으로는 남편이, 아이들이 가족인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이 가족 같지 않니?"
북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휘게(Hygge) 전도사가 된 친구의 말이었습니다. 이제는 잘 대접하고 잘 대접받는 데 중점을 두지 말고 편하게 모일 수 있는데 중점을 두자며 서로 음식도 해오지 말자고 하네요. 그보다는 그 날 무엇이 먹고 싶은 지 의기투합이 되면 함께 만드는 과정부터 즐기자는 거였습니다. 오래된 친구끼리, 모이면 행복한 사람들끼리, 감자를 까서 감자전을 부치고, 야채를 씻어서 샐러드를 만들어먹으면서 말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휘게의 한 형태라고 했습니다.
휘게는 편안함, 아늑함, 따뜻함을 뜻하는 덴마크어라면서요? 행복은 크고 화려한 성공에 있지 않고, 1시간 단위로 약속을 해놓고 비즈니스처럼 사람을 만나는 바쁜 삶에도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명품을 빼입고 그에 어울리는 유능한 사람들과 비싼 호텔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에도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작고 소소해보이지만 마음이 정화되는 경험, 마음이 열리는 경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늑한 경험에 있다는 겁니다.
내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마음의 정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압니다. 함께 먹을 밥상이건 혼자 먹을 밥상이건, 직접 느긋하게 밥상을 차리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를 압니다. 시간에 쫓기며 일에 쫓기느라 마음을 나누며 살 수 없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방치하고 있는 거지요?
지금 늘 바쁘게 살고 있다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빠야 하는 지 내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 삶에서 뺄 수 있는, 필요하지 않는 일은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나는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과 별 필요가 없는 것을 사들이는 것은 심리적으로는 같은 맥락입니다. 그때그때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을 다 사서 모으면 내 집은 온갖 잡동사니로 넘쳐나는 여백 없는 집이 될 것입니다. 사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면 풍요로워 보이나 실상은 각박한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바쁘다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내용인 가난한 인생이 되어있을 테니.
휘게는 더 많은 필요를 만드는데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서 옵니다. 만나는 사람도, 일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단순화하고 단순화하고 단순화하기, 이것이 요즘 제 화두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화두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장書狀'에서 대혜스님이 유발 제자인 증시랑에게 주는 편지는 곱씹을 만 합니다. "있는 것을 비우기 원할망정 없는 것을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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