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1454~1504)은 '소학'을 중시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자신을 수양하는 데 힘써서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를 삼은 자는 오직 한훤당 한 사람뿐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김굉필은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천거되어 남부참봉,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양, 합천, 현풍, 양평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그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당하자 조광조가 그를 찾아왔던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김굉필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훈구파들이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가 노산군(단종)을 폐위한 사실을 빗대어 비난하고자 실었다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비롯해, 세조가 덕종(세조의 장남)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던 사실, 영응대군(세종의 8번째 왕자)의 부인 송씨와 승려 학조가 밀통했던 사실, 소릉(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능)을 파헤쳐 그 재궁을 바닷가에 버린 것을 비판한 기사, 황보인과 김종서가 절개를 위해 죽었다고 표현한 기사 등을 연산군에게 고하여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도로 지목되어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곳에서 곧이어 김굉필은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사사 사건에 의해 발생한 갑자사화에 얽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중종반정 직후 김굉필은 승정원 도승지로, 1519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드디어 1610년 문묘에 종사되어 최고 유학자 반열에 올랐다. 현풍에는 김굉필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도동서원이 있는데, 최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된 한국의 9개 서원 중 한 곳이다. 도동서원을 방문하여 김굉필의 정신을 본받아 실천하는 자세를 기를 것을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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