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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비오는 날의 슈퍼맨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연출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올해 여름은 유독 더 더웠던 것 같다. 아마 어디에나 있는 에어컨 실외기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걸 보니 가을이 오나보다. 연신 부채질을 하던 손은 이제 추위를 피해 호주머니를 찾을 것이고,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땀에 옷이 젖어 괜히 짜증이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여름의 끝을 알리듯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 특유의 비 냄새와 빗소리는 못 보던 것을 보게 만들거나 기억하지 못하던 것을 기억나게 한다.

어린 시절, 비가 오면 우산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 짓(?)이 시작되었는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긴 기간 동안 호사를 누렸다. 우산을 들고 다녀야하는 번거로움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이랄까?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다보면 땀과 비 때문에 옷이 흠뻑 젖었다.(물론 비가 올 때마다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어느 날, 비에 옷이 젖어 바닥에 떨어진 빗물위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웃으셨다. 아마 내 몰골 때문이거나 맷돌의 손잡이를 잃어버리셨던 모양이다.

하루는 비가 오자 어머니께서 빨래통에 있던 옷 한 벌을 내어주셨다. 매번 멀쩡한 옷을 버려오니 어차피 젖을 옷을 꺼내주신 것이다. 국회에서 발의된 법률안이 통과된 사람처럼 나는 기뻐했다. 이제 합법적으로 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이니까. 그렇게 법의 보호아래, 슈퍼맨이 공중전화부스에서 옷을 갈아입듯 비가 오면 나는 옷을 갈아입고 슈퍼맨이 되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 더 이상 빨래통에서 옷을 찾지 않았다. 아마 친구들의 이상한 시선이 의식되었던 것 같다.

여전히 빨래통에는 옷도 많은데 비오는 날 슈퍼맨은 더 이상 없다. 이유 없는 행복에 대한 의심과 머리무게가 무거워진 만큼 이제는 움직이는 일에 주저함이 생긴다. 우리는 사회적 위치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작은 행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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