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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전망]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 통과되지 못한 법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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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편집국 부국장
김수용 편집국 부국장

죽음을 애통해 하는 까닭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리라. 실수는 만회할 기회가 있고, 헤어짐은 돌아옴을 기대하지만 죽음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되돌리지 못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남은 자의 가슴에 묻히고 기억에 머문다. 그런 통한의 기억도 망각의 치유제를 만나면 조금씩 잦아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바로 자식의 죽음이다. 먼저 떠난 자식은 가슴에, 기억에 뽑히지 않는 못으로 박힌다. 잠시 죽음을, 아픔을 잊을 수 있겠지만 어느새 다시 살아난 기억은 마치 처음처럼 부모의 가슴을 헤집는다.

그처럼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고통 속에 부모들이 용기를 냈다. 돌이킬 수 없는 내 자식의 죽음이 안겨준 고통을 다른 누군가는 결코 겪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통함과 허망함을 부디 티끌만큼이라도 보상받기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결과물이 아이들의 이름을 딴 법안들이다. 재윤이, 민식이, 해인이, 한음이, 하준이, 태호와 유찬이. 먼저 보낸 자식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고통일 테지만 부모들은 조금 더 나아진 세상을 만들고자 기운을 냈다.

2010년 백혈병 치료 중 의료진 실수로 항암제가 교차 투여돼 9세 아동이 목숨을 잃었고, 2017년 12월 한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오염된 주사로 신생아가 숨을 거뒀다. 지난 2017년 11월 김재윤(당시 6세) 군은 고열로 입원한 상태에서 무리한 골수검사를 받던 중 숨지고 말았다. 의료진의 과다 약물 투여와 관리 의무 소홀 문제가 논란이 됐고, 앞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중대 의료사고 발생 시 보고를 의무화하는 이른바 '재윤이법'이 지난해 2월 발의됐다.

2016년 4월 6일 광주 한 통학 차량 안에서 세상을 떠난 박한음(8) 군의 이름을 딴 '한음이법'은 통학 차량 내 CCTV를 설치하고, 영상정보를 일정 기간 이상 보관하며, 통학 차량 운전자나 교사가 이를 확인토록 하고, 위반 시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6년 4월 14일 경기도 용인에서 경사로를 따라 내려온 어린이집 차량에 치인 뒤 응급 조치도 제대로 못 받고 이송 도중 숨을 거둔 이해인(5) 양의 이름을 딴 '해인이법'. 13세 미만 어린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응급의료기관에 옮겨 필요한 조치를 다 하도록 하고, 사고 방치 시 1년 이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2017년 10월 1일 경기도 과천 서울랜드 주차장에서 주차 차량이 미끄러져 내려와 세상을 떠난 최하준(4) 군의 이름을 딴 하준이법은 경사진 주차 공간에 미끄럼 주의를 표시하고 미끄럼 방지시설을 설치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9년 5월 15일 인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인근 네거리를 지나던 한 축구 클럽 승합차가 과속 운전을 하다가 마주 오던 승합차와 충돌했고, 그 사고로 김태호·정유찬(7) 군이 목숨을 잃었다. '태호·유찬이법'은 어린이 통학 차량의 안전 기준을 강화하고 안전운행 기록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조치를 담고 있다.

우리가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짧은 세상과의 만남을 뒤로한 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떠났고, 그들의 이름을 딴 법안들만이 남았다. 물론 입법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과 숙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서로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해 딴청만 피우는 정치 집단의 다툼 속에 아이들의 이름을 딴 법안들이 제대로 된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폐기되는 일만은 없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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