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재 조영석이 주변에서 찾은 그림거리 중 스님을 그린 그림이다. 왼쪽 위에 '관아재 사(觀我齋寫)'라고 쓰고 백문방인 '관아재'를 찍었다. 노스님이 나무 둥치와 지팡이에 기대 다리쉼을 하고 있는 광경이어서 '노승헐각(老僧歇脚)'으로 제목이 붙여졌다. 눈 꼬리는 처졌지만 눈빛은 또렷한 삼각형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의 스님은 수염이 무척 성글다. 입이 합죽해 보이는 것은 이가 좀 빠졌기 때문인 듯. 길쭉한 모자 안으로는 동그란 민머리가 나지막하다. 목에는 굵은 염주를 둘렀고 짚신이나 미투리일 초혜(草鞋)를 신었다. 메었던 바랑을 풀 섶에 툭 던지고 소나무 뿌리에 걸터앉으며 "휴우~"라고 하셨을 것처럼 생생하다.
스님의 이목구비와 차림새, 앉은 자세가 자연스러워 한참을 모델로 모셔두고 그렸을 것이다. 조영석은 굵은 선과 가는 선, 짙은 선과 옅은 선, 속도감 있는 선과 침착한 선 등 필선 자체를 주된 조형요소로 활용해 함축미 있게 대상의 특징을 묘사했고, 옅은 먹과 은은한 담채로 노스님의 모습을 친근하면서도 실감나게 나타냈다. 조영석이 선의 표현력을 통해 보여준 격조 높은 화면은 화가가 자신의 눈으로 본 일상의 회화화가 감상화의 한 분야로 진정하게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조영석은 이렇게 실물을 직접 대하고 그리는 '즉물사진(卽物寫眞)'을 해야 살아있는 그림인 '활화(活畵)'가 된다고 했다. 그림 교과서인 화보(畵譜)나 옛 그림에 나오는 정형(定型)에 의지해 공인된 레퍼토리를 반복했던 앞 시대 화가들과 다른 태도였다. 고상한 고급 교양인 감상 회화는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지며 축적된 고전을 모범으로 삼는 상고(尙古)주의의 틀 안에 있었다. 조영석은 그런 고정 관념을 허물어 감상화의 영역에 주변의 삶을 들여놓았고, 이러한 조영석의 생각과 실천으로 인해 조선후기 회화는 '풍속화'라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풍속화에는 양반도 나오고 농공상(農工商)의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을 비롯해 기생과 스님 등 특수한 직업과 신분의 인물도 나온다. 스님은 그림에 일찍이 나타났다. 인평대군 이요(1622-1658)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스님 그림도 있고 윤두서(1668-1715)도 스님을 그렸다.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화원화가들도 스님을 그렸다. 신윤복은 비구니 스님과 동자승을 출연시키기도 했지만 풍속화에서 스님은 대부분 노승이다. 왜 노승일까? 혈족의 인연을 끊고 세상을 등지고 출가한 스님의 나이든 모습이 누구나 늙고 결국은 죽는다는 분명한 진실을 더 확실히 일깨워주기 때문인 것 같다.
미술사 연구자





























댓글 많은 뉴스
'최고가격제'에도 "정신 못차렸네"…가격올린 주유소 200여곳
대구 취수원 이전 '실증 단계' 돌입…강변여과수·복류수 검증 본격화
경북 서남부권 소아·응급·분만 의료 인프라 확충
1시간에 400명 몰렸다… 고물가 시대 대학가 '천원의 아침밥' 인기
대구시, 11월까지 성매매 우려업종 점검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