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이야기] 대한광복회, 대구 달성공원서 결성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대한광복회는 1915년 8월 25일(이후 날짜 양력)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과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을 중심으로 달성공원에서 결성되었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 유림단의 독립청원서 전달, 독립군을 양성할 청장년 모집에 힘을 기울였고, 반면 풍기광복단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었던 박상진(1884~1921)은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백부에게 입양된 후, 경북 경주시 외동면 녹동리에서 성장하였다. 전기의병 당시 김산의진을 일으켰던 왕산 허위(1855~1908)의 제자가 되었고, 상경하여 양정의숙 전문부 법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중국 톈진(天津)을 방문하여 무기를 구입하였고,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주선으로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는 이준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허위가 강화에서 거병하였을 때 군자금 5만원과 무기를 제공하였고, 영덕에서 영릉의진을 이끌었던 신돌석뿐만 아니라 군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던 김좌진과 각각 의형제를 맺기도 하였다.

박상진은 허위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고, 융희 황제가 남쪽으로 순행할 당시에는 동래온천에서 매국노를 처단하려다가 적발되어 실패했던 적도 있었다. 이후 박상진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상해·연해주 등지를 답사하는 동안 신해혁명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만주에서 돌아온 박상진은 여러 동지들과 논의한 끝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전국적으로 8명의 지부장을 임명하였고 국내외에 연락 기관을 설립하여 대부분 곡물상 상업조직으로 위장하였다. 국내에는 상덕태상회(대구)와 대동상점(영주)을, 만주에는 안동여관(신의주)·삼달양행(단둥)·상원양행(창춘)을 통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독립운동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대한광복회 지휘장 권영만과 우재룡은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1915년 12월 24일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 마차를 습격하여 경주·영덕·영일 지역에서 거둔 세금 8천700원을 탈취하였다. 한편,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이진룡은 1916년 10월에 운산금광 현금 수송 마차를 공격하여 6명을 사살하고 체포되었는데, 그의 후임으로 김좌진이 임명되었다. 그 밖에도 직산금광·상동금광을 습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대한광복회는 1916년 9월 3일 서우순의 사위였던 김진만을 앞세워 서우순을 협박하여 군자금 모집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는데, 이를 '대구권총사건'이라고 부른다(조선국권회복단도 참여함). 더 나아가 김좌진은 1917년 5월을 전후하여 중국 단둥에서 중국 지폐를 위조하여 이를 정화(正貨)로 바꾸어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 역시 무산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의열투쟁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황해도 지부원들은 1916년 7월 무렵에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단둥과 창춘에서 암살할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친일 부호 중에 칠곡의 장승원, 벌교의 서도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다. 박용하를 암살한 직후인 1918년 1월 말부터 대한광복회 회원들이 검거되기 시작하여 2월에는 박상진이, 8월에는 채기중이 체포되었다. 이후 채기중은 1921년 7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박상진은 그해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현재 달성공원에는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던 장소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다만 박상진의 스승이었던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가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대구시 북구 검단동에는 채기중을 기리는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기념비'를 찾아볼 수 있다. 대한광복회는 공화주의와 복벽주의(군주국가로 회복하려는 사상)의 상반된 이념을 가졌던 인물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협력하여 헌신했다는 측면에서, 좌우 대립 혹은 진보·보수의 대결로 양분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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