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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박생광(1904-1985)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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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수묵, 70×90㎝, 개인 소장
종이에 수묵, 70×90㎝, 개인 소장

2021년 올해의 간지는 신축(辛丑)이고 해당하는 동물은 소이다. 오랫동안 농경사회였던 한국에서 소는 농가의 일꾼이자 재산으로 존중받았다. 한국미술사에서도 소는 주인공으로 또는 조연으로 함께해왔다. 소 그림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김지와 그의 손자인 김식은 중국 화보 풍으로 태평한 모습의 소를 산수 배경으로 그렸다. 18세기에는 쟁기를 메고 농부와 함께 일하는 모습으로도 나오고, 소년과 더불어 목가적 풍경을 이루기도 하며 풍속화에 등장한다.

20세기에 소는 서양화가들의 뮤즈였다. 이중섭(1916~1956)의 소 그림 10여 점은 그의 자아가 투영된 분신인 듯 여겨지고, 화풍만큼이나 소재도 간결했던 장욱진(1918~1990)도 소를 즐겨 그렸다. 이중섭의 대표작 중 하나인 '붉은 소'(삼성미술관리움 소장)는 그가 1954년 5월 선배 화가 박생광(1904~1985)의 초청으로 진주 카나리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박생광에게 선물한 그림이라고 한다. 박생광이 소를 많이 그린 것은 이중섭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는 박생광이 작고하기 한 해 전인 81세 때 작품이다. 단청 안료로 훨훨 날며 채색화를 그리던 만년에도 박생광은 수묵으로 동물과 누드를 더러 그렸다. 많이 그린 동물은 호랑이, 용, 소 등이다. '소'는 화면이 넘치도록 클로즈업한 소 한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우두커니 응시하는 그림이다. 윤곽선은 두텁고 묵직하며 먹색은 노동의 피로를 말해주는 듯 흐릿한 질감이다. 소의 눈은 동자를 희게 남기고 동공을 검은 점으로 거꾸로 그려 눈동자의 화이트가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극적 효과로 나타났다. 눈동자에 드리운 몇 가닥 속눈썹, 코에서 뻗친 수염이 이 소의 순박함과 어짊을 연상시켜 박생광 수묵화의 비 묘사적이면서도 실물 느낌을 주는 표현력에 감탄하게 된다.

오른쪽 위의 물고기 한 마리는 박생광이 불교에서 의식에 사용하는 사물(四物) 중 하나인 목어(木魚)를 활용해 디자인한 독특한 서명 박스이다. 초록물고기 안에 날짜, 서명, 인장을 모두 넣어 '내나라 사천삼백열일곱해 박생광'으로 쓰고 인장 '박생광그대로'를 찍었다. 단기 대신 '내나라'로, 4317이나 사삼일칠(四三一七) 대신 '사천삼백열일곱'으로, 년(年) 대신 '해'로, 내고(乃古) 대신 한글 호 '그대로'를 새겼다. 단군기원과 한글전용, 가로쓰기, 한글 호, 한글인장 등은 우리다움에 대한 그의 깊은 애착을 보여준다. 한글전용과 가로쓰기가 신문에 적용된 것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부터였다. 박생광은 그림에서 도약한 만큼이나 팔십 전후의 나이에 낙관에서도 새로워졌다.

차분한 호흡으로 황소처럼 성큼성큼 내딛어 가는 우보만리(牛步萬里)의 한 해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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