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씨, 그림 세 가지를 다 잘 한 삼절이 조선시대에 여럿 있지만 그 중 자하(紫霞) 신위를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시서화 중 방점을 어디 찍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문인예술의 으뜸인 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신위가 으뜸이 될 것 같다. 신위의 시는 그가 직접 정리한 4천여 수가 전하는데 근대 전환기의 문학가 김택영은 그 중 932수를 고른 '신자하시집'(1907년)을 중국 남통(南通)에서 간행하며 서문에서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신위를 꼽았다.
신위의 그림은 묵죽이 유명하지만 산수화도 다수 남아 있다. '방대도'는 제화시를 먼저 읽어야 그림이 이해되는 문인화의 한 전형이다.
일각응빙풍노호(日脚凝氷風怒呼) 햇발은 얼어붙고 바람은 거세게 부르짖으니
루음산대합모호(樓陰山黛合糢糊) 그늘진 누각 검은 산 모두 어렴풋하네
몽회주기전소석(夢回酒氣全消席) 꿈에서 돌아오니 술기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인정향연상재로(人靜香煙尙在罏) 인적은 고요한데 향 연기는 술항아리에 여전하네
일점사비융난연(一點斜飛融㬉硯) 한 점 눈 날아들어 벼루에 떨어져 녹고
건성취지변한노(乾聲驟至變寒蘆) 건조한 소리 휘몰아치니 차가운 갈대 요동치네
우연수묵참황미(偶然水墨參黃米) 우연히 수묵으로 황공망과 미불을 참조해
맥지신유방대도(驀地神遊訪戴圖) 홀연히 정신을 노닐으니 방대도라네
초설주후(初雪酒後) 자제(自題) 황불황미불미법(黃不黃米不米法)
첫눈이 내려 술 마신 후 쓰다. 황공망이면서 황공망이 아니고, 미불이면서 미불이 아닌 화법이다.
신위는 그 해 눈이 처음 내린 날 "왕휘지가 대규를 찾아간 그림"인 '방대도'를 그렸다. 왕휘지가 어느 날 밤중에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노라니 문득 대규가 보고 싶었다. 왕휘지는 소흥에 대규는 소주에 살고 있었다. 곧 배를 타고 찾아갔으나 왕휘지는 대규의 집 문 앞에서 그냥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중국 위진시대 명사들의 별난 언행을 기록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온다. 왕휘지는 서성(書聖)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로 그도 유명한 서예가이다.
사람들이 밤중에 그 먼 길을 가서 왜 만나지 않았냐고 묻자 "흥이 일어나서 갔고, 흥이 다해 돌아왔을 뿐 꼭 만나야 하나?"라고 대답했다. 마음이 가는대로 행위의 과정을 향유할 뿐 목적에 구애받지 않았던 왕휘지의 천진한 흥취와 초탈한 태도를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에 많은 사람이 공감해 고사도(故事圖)의 한 주제가 되었다. 눈이 내리면, 특히 첫눈이 내릴 때면 누군가가 생각나는 것은 고금에 같은가 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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