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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FOCUS]일본 지도층의 성차별 발언, 일본 사회의 민낯과 후진성 드러내

오는 7월로 예정된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을 앞두고 일본 정부와 올림픽 조직위는 개최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오는 7월로 예정된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을 앞두고 일본 정부와 올림픽 조직위는 개최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재연기' 또는 '취소'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모리 요시로(森喜朗)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이 여성 차별 발언을 한 후폭풍까지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김지석 디지털 논설위원
김지석 디지털 논설위원

모리 요시로(森喜朗)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이 여성 차별 발언을 한 후폭풍이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모리 회장은 지난 3일 열린 일본올림픽위원회(JOC) 임시 평의원회에서 여성 이사 증원 문제를 언급하면서 "여성이 많은 이사회는 (회의 진행에) 시간이 걸린다"고 말해 여성을 멸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후 모리 회장이 사과하고 일단락지으려 했으나 올림픽 자원봉사자들이 반발해 그만두는 등 파장이 국제적으로 번졌다. 그가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그는 얼마간 버티다 결국 물러나기로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모리 회장이 사과했으니 끝난 문제라고 했다가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입장을 바꿔 9일 "완전히 부적절하고 IOC 공약과 올림픽 개혁에 반한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과 후원사들은 모리 회장의 발언이 용납될 수 없다는 목소리를 잇따라 냈다. 도쿄올림픽 대회의 비전인 '다양성과 조화'에 반한다거나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올림픽·패럴림픽 정신에 반해 부적절하다는 등의 지적이 이어졌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 (Human Rights Watch)는 일본의 성차별 상황이 금메달급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HRW는 "모리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올림픽 위원회는 성 평등과 스포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기관"이라면서 "연맹 체제로 이뤄진 일본 스포츠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배제돼 있다"고 지적했다. HRW는 또 "최근 보고에 따르면 일본 스포츠계에서 여자 선수들과 아이들에 대한 학대 정황이 보고되고 있다"는 점도 꼬집었다.

모리 위원장의 문제 발언은 JOC 내 여성 이사 비율을 20%에서 40% 이상으로 높이자는 제안을 두고 나왔다. 그는 "여성은 경쟁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말을 하면 다른 사람도 말하려고 한다"면서 "여성 이사를 늘리고 발언 시간을 규제하지 않으면 회의가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다가 역풍을 맞게 됐다. 코로나19 위기로 연기된 도쿄올림픽 개최에 힘을 쏟아야 할 인물이 성차별 발언으로 개최 문제를 더 어렵게 꼬이게 했다는 점에서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모리 위원장의 발언은 성차별적 문화가 만연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면서 지도층 인사 조차 성차별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자 선진국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성차별적인 사회의식 등은 후진적 면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의 성(性)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149개 나라 가운데 하위권인 110위에 그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를 두고 "일본은 다른 선진국에 견줘 성평등 수준이 한참 뒤처진다"고 평가했다.

모리 위원장은 과거에 총리를 지낸 인물로 이전에도 여러 차례 성차별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던 전력이 있다. 그는 2003년 6월 저출생 관련 토론회에서 "아이를 한 명도 낳지 않는 여성을 세금으로 돌보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또 2014년 2월 한 강연에서는 당시 현역이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아사다 마오의 소치올림픽 연기에 대해 "그 애, 중요한 때는 반드시 넘어져요"라고 비꼬아 선수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모리 뿐만 아니라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아베 신조 전 총리 등 일본의 고위 정치인들은 성차별 발언으로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다. 아소 다로는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뽑은 최악의 성차별 발언 정치인으로 2018년과 2019년 연속 1위의 불명예를 안았고 아베 신조는 아소 다로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아소 부총리는 2019년 2월 저출산·고령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일본인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좋은 일이다. (사회의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해) 노인이 나쁜 것처럼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은 쪽이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망언 제조기'로 불리는 아소 부총리는 2018년에는 재무성 차관이던 후쿠다 준이치가 방송사 여성 기자에게 성폭력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자 "그런 발언을 들어서 싫으면 그 자리를 떠나 돌아가면 되지 않냐. 재무성 담당 기자를 모두 남자로 하면 된다. 만지지 않았으면 괜찮은 것 아니냐" 등의 발언을 했다가 비난받았다. 아베 전 총리는 재임 당시 내각에 여성 비율을 높이겠다고 공언했으면서도 2019년 7월 중의원 선거 유세 과정에서 투표를 독려하며 "아버지도 연인에게 권해서, 어머니는 옛 연인을 찾아내서 투표함이 있는 곳으로 가서…"라고 발언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치인들은 대체로 성평등 의식이나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됐다.

일본 여성들은 그동안 사회 분위기에 억눌려 차별을 감수하고 지냈으나 최근에는 반발하는 등 달라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9년 11월에 일본에서는 여성들의 안경 착용을 금지한 회사 규정에 반발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이보다 앞서 여성 직원에게 하이힐을 강요하는 규정에 대한 반발도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부에 여성복장 규정 개선을 청원하는 '구투'(Ku too) 서명운동으로 번졌다. 구투는 신발을 뜻하는 일본어 구쓰(靴)와 고통이라는 의미의 구쓰(苦痛),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결합해 만든 조어다. '구투 운동'의 영향으로 지난해 4월 일본항공(JAL)은 여자 승무원의 하이힐 의무 착용 규정을 삭제했다.

일본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일본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우리나라도 2018년 4월에 공중파 방송의 아나운서가 안경을 끼고 뉴스를 진행했다 하여 화제가 되었다. 여성 아나운서나 여성 기상캐스터의 용모와 복장을 따지고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복장규정을 강요하는 것이 일본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구투운동에 자극받아 국내 여성계에서도 불합리한 복장규정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사회 전반의 성평등 의식이 나아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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