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낳은 문학가 현진건과 이상화는 꽤나 비슷한 삶을 살았다.
1900년에 대구에서 태어난 현진건은 1921년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 1924년 '운수 좋은 날', 1926년 '고향'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1936년에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보도하면서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시킨 일로 일제에 구속돼 옥고를 치른다. 현진건은 신문사 강제 퇴사 이후 줄곧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친일문학을 거부하다 1943년 4월 25일 타계했다.
1901년에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화는 현진건의 추천으로 동인지 '백조'의 일원이 된 후 1923년 '나의 침실로',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해 한국문학사에 큰 이름을 남긴다. 윤봉길 지사가 '개벽'에 발표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보고 감동해 중국으로 망명한 일화는 유명하다. 3‧1운동과 'ㄱ당' 사건 등 항일운동에 헌신한 독립유공자 이상화는 현진건과 같은 날인 1943년 4월 25일 별세했다.
가족사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현진건의 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현정건이고, 이상화의 형은 중국군 장군으로서 임정을 크게 도운 이상정이다.
똑같아서 마음이 아픈 것은 두 분의 삶과 죽음만이 아니다. 걸출한 문학가이자 언행일치를 생의 최고 덕목으로 여긴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 두 분을 후대가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는 점 또한 같아서다.
우선 문학관의 부재가 뼈아프다. 친일 행위를 한 유명 문인들을 섬기는 문학관은 전국 방방곡곡에 수없이 많지만 참된 지식인의 면모를 온몸으로 보여준 두 독립지사를 기리는 '이상화 문학관'과 '현진건 문학관'은 없다.
문학관에 대해서는 두 분의 옛집이 모두 계산동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면 한다.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현진건 생가는 계산동2가 169번지에 있었고, 이상화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집은 현충시설 '상화 고택'으로 변하여 계산동2가 84번지에 남아 있다. 삶의 궤적이 거의 흡사하고, 집도 인근인 만큼 '이상화 현진건 문학관'이라는 공동 이름의 기념 공간이 탄생하면 금세 전국적 지명도를 얻게 될 것이다.
이상화 문학상과 현진건 문학상에 대해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학상 대상을 차세대의 주역인 학생들로 했으면 한다. 기성 문인들을 대상으로 하면 문학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그 분야 전문가들로 제한되지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면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장점이 있다.
또 하나, 상의 성격과 명칭도 바꿨으면 한다. 두 분은 문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시인 또는 소설가로만 정체성을 좁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상화 문학상'과 '현진건 문학상'을 '이상화 상'과 '현진건 상'으로 바꾸어 두 분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도 격려하면 더욱 의미 있는 상이 될 것이다.
인구 18만 명의 경기도 안성은 향토 출신 박두진 시인 탄생 100주년에 기공해 타계 20주기를 맞아 2018년 '박두진 문학관' 준공식을 가졌다. 인구 250만 명의 대구는 이상화, 현진건 타계 78주기를 넘기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이상화 현진건 두 분을 제대로 현창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은 후대인인 우리의 역사 인식이 흐리기 때문이다. 두 분의 기일쯤에 바람직한 대책이 발표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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