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진숙의 영국이야기] 불평을 세지 말고, 축복을 세어라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영국에서는 내가 궁금한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볼 수도 있다. 나이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노인과의 대화는 지루하지 않고, 열정이 있고 용감한 노인의 모습은 감탄스럽다. 노인의 평범한 일상이 내 상상을 뛰어넘어 눈이 번쩍 뜨인다. 나이가 들어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과 주름이 있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까지 생길 정도다.

78세 할머니가 아직도 민박집을 운영한다.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앉아서 듣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갔는데, 접시에 비스켓을 담아놓고 티팟에 차를 우려 놓고 나를 기다린다. 나를 위한 준비가 간단해서 부담이 없다. 어른 앞이라고 어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어른 말씀이라고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서 좋았다. 어른을 만나서 제일 좋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연륜과 지혜가 묻어난 깨달음을 얻어오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가 옥스퍼드대학의 캠퍼스를 안내한다. 은퇴 후 새로 이사 온 도시에서 역사를 공부해 가이드시험까지 봤는데, 시험발표 전에 공부한 것을 지인들에게 나눠준다는 거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그렇게 '친구'를 만들고 그렇게 '할 일'을 만든다. 좁은 골목골목을 따라다니면서 건물마다 얽힌 유구한 스토리를 들었다. "가까이 살면서도 처음 알았다."는 이에게 "나도 두 달 전엔 몰랐다."는 그의 대답이 귀에 남는다. '이제라도 알고 산다는 것'을 생각하며 놓칠세라 맨 앞에서 귀를 쫑긋했다.

영국친구가 최근 집을 새로 수리했다. 부엌은 더 밝고 편리해졌고, 다이닝 룸은 더 아늑해졌고, 늘어난 화분들로 정원은 더 아름다워졌다. 칠십이 넘은 부부가 집을 이렇게 예쁘게 해놓고 산다. 날씨가 좋으니 바비큐를 하자고 친구들을 부르고, 차 한 잔을 마시자고 부르고, 함께 악기연습을 하자고도 부른다. 자주 모이고 자주 이야기하고 많이 웃는다.

영국에 가면 나는 노인들도 지켜본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고, 할아버지가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러 간다. 아들과 함께 왔는데도 할아버지가 펍(pub)의 카운터에 서서 직접 주문하고 손수 음료수를 나른다. 미술관에 노인들이 가득해서 놀란다. 작품의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이젤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작품을 감상한다. 채리티 샵(기부를 위해 자선단체들이 운영하는 가게)의 자원봉사자는 전부 노인들이다.

그들은 '늙음을 탄식하고 우울해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90세 노인이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정말로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수영을 다니고, 103세 노인이 수퍼 가는 길에 옆집에 들러 "뭐 사다줄 거 없느냐?"고 묻는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는 노인에게 의사는 "불평을 세지 말고 축복을 세라."고 처방한다.

영국인은 자조정신이 강하므로, 노인이 되어도 절대 자식과 함께 살지 않는다. 양로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은퇴하면 정부연금으로 살다가 거동이 힘들어지면 양로원으로 가기를 원한다. "bravo! You're still alive! happy birthday(브라보! 아직 살아있네요! 생일 축하)"라며 삶을 축하하고, "the good thing about getting older is your secrets are safe with your friends... as they can't remember them either!(늙어서 좋은 건 친구들끼리 비밀을 털어놔도 안전하다는 거다. 기억을 못하니까.)"라며 늙음을 웃어넘긴다.

내 앞의 삶이 막막한 것은 멋진 노인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웃지도 않으면서 인상 좋은 노인이 되기를 원하고, 나누지도 않으면서 넉넉한 노인이 되기를 원하고, 우아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인생은 사는 대로 되는 거다. 원하는 삶을 살아야 원하는 삶을 얻을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매일매일 조금씩 그렇게 사는 거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