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종교자유에 관한 이야기 1

전헌호 신부, 천주교대구대교구 소속

어느 한 종교는 그 시대에 어떠한 처지에 있었는지 정치권력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다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유동적인 입장에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신봉하는 작은 단체로서 황제를 신으로 추대하여 제국의 정치, 사상의 중심으로 삼던 상황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박해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종교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박해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종교자유가 자연법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것은 양심의 사항이고 양심의 문제를 폭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였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들과 동등한 합법적 종교로 인정했다. 이어서 그리스도교는 380년 국교가 되었고 392년 다른 모든 이교적 종교행위를 금지하여, 박해를 받던 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탄압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교회 고유의 영역이 국가의 이념과 의도를 위해 이용되기도 했고, 황제가 분리주의자들과 이단자들을 쳐부수는 책임을 맡음으로써 '교회 외부적 사항의 주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세속화되는 위험과 국가가 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위험을 초래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교화 된 서양은 중세에 들어 교회와 국가가 공생하는 상황을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중세의 유럽은 그리스도교만을 진리를 가진 참된 종교로 여겼기 때문에 진리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것을 금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의 사건으로 그리스도교에 여러 종파들이 생겼지만 아직 현대적인 개념의 종교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의 종교평화조약에 의해 가톨릭교와 개신교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존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종파를 믿을 수 있는 종교자유는 전혀 허락되지 않아서 일반 백성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의 신앙을 따라 믿어야 했다. 군주가 개신교를 신봉하면 자신도 그렇게 해야 했고 가톨릭교를 믿으면 그것을 따라야 했지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군주가 믿는 것과는 다른 종파를 믿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파를 신봉하는 군주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주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은 본격적인 종교자유의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으나 모든 제후들이 이 자유를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문제로 영국에서 어려움을 겪던 청교도들은 자신이 믿는 종파의 자유를 찾아 멀고 먼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낯선 땅에 도착한 이들의 고충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그 강인한 생명력은 지구촌에 큰 영향을 남겼다.

30년 종교전쟁을 겪은 후 1648년에 가진 베스트팔렌의 평화 조약은 군주가 믿는 종파와 상관없이 개인의 종교자유를 좀 더 허락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국가는 개인의 문화와 종교 양심의 자유를 좀 더 존중하여 이러한 사항들은 차츰 개인의 선택에 맡기고, 국가는 사회 전체의 질서와 평화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는 것에 주로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신흥종파나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믿을 수 있는 공식적인 자유는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허락되었다.

종교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칼럼들에서 좀 더 진행할까 한다.

신부, 천주교대구대교구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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