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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산책] 수박이 최고 - 김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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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지만 조보(朝報) 따윈 나와는 무관한 것 惠來朝報似不關(혜래조보사불관)

초야에 묻힌 사람 정치를 알아 뭐해 丘壑何須識千官(구학하수식천관)

얼씨구나, 수박은 달기가 꿀인 데다 最憐珍果甘如蜜(최련진과감여밀)

갈증을 가시게 하고 속도 시원하게 하고 能使枯腸潤更寒(능사고장윤갱한)

*원제: 地倅送朝報與西果(지쉬송조보여서과: 고을 원이 조보(朝報)와 수박을 보냈기에)

위의 시를 지은 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 1574-1643)은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전쟁 두 개가 그의 생애를 뚫고 지나갔다. 서른세 살에 성균관에 입학을 하여 서른아홉 살에 진사과에 합격할 때만 해도 무언가 풀릴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廢妃)를 반대하는 대자보를 겁도 없이 냅다 붙였다가 선비의 명부에서 제명되었다. 대책문(對策文: 어떤 일에 대처할 방책을 적은 글)이 수석을 차지했지만,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를 당한 후엔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다 세상을 떠났다.

한번은 시골에 묻혀 살던 추담에게 고을의 원님이 조보(朝報)와 함께 수박을 선물로 보내왔다. 조보가 뭐더라? 조보는 조정에서 발행하는 공보용에다 홍보용 신문이니, 나라의 행정과 정치에 관한 골치 아픈 일들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을 터. 이제는 돌아와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에게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럼 수박은? 해병대 얼룩무늬에 칼날을 슬쩍 들이대는 순간, 수박이 깜짝 놀라 대번에 쩍 하고 갈라지면서, 표리부동하게도 붉은 마그마가 이글이글 대는, 그러나 막상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도 시원한 과즙이 왈칵 쏟아지는 수박이야 말할 것도 없이 '얼씨구나 좋구나, 지화자 좋다'다. 제발 원님이여! 다음에 또 선물을 보내려거든 조보 따윌랑은 보내지 말고, 수박을 하나 더 보내주시라.

꼭지가 곧은 것보다는 꼬부라진 것, 밑동의 배꼽이 큰 것보다는 작은 것, 꼭지와 배꼽이 뒤틀린 것보다는 마주 보고 있는 것, 두드려 보아 '특특', '툭툭'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보다는 '텅텅', '통통' 맑은소리가 나는 것, 표면의 색깔이 선명하고 줄무늬가 분명한 것이 더 맛있는 수박이라고 하니, 이왕이면 맛있는 것으로 골라 보내주시면 금상첨화(錦上添花)고.

'이종문의 한시 산책'이 오늘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오랜 산책을 마감하게 됐다. 그동안 귀한 지면을 내어주신 매일신문사와 산책을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며, 아름드리 수박 하나씩을 품에다 왈칵,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자, 그럼 안녕!

이종문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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