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전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Stasi·국가안보부)에 포섭된 서독 내 간첩은 2만~3만 명에 달한다. 이들을 이용해 동독은 서독을 가지고 놀았다. 1975~1976년 소련 미사일 SS-20의 동독 배치에 대항한 미제 퍼싱Ⅱ 미사일의 서독 배치를 반대한 '평화운동'이 그런 예다. 이 운동을 이끈 단체 중 '평화를 위한 장군들'이란 게 있었는데 슈타지의 주도로 창설돼 매년 10만 마르크의 거액을 지원받았다.
가장 극적인 예는 사민당 소속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정치적 굴곡이다. 동독은 브란트의 정치 생명도 가지고 놀았다. 1972년 기민당 총재 라이너 바르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비난하면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불신임안은 가결될 가능성이 높게 전망됐지만 부결됐다. 가결에 필요한 249표에 2표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기민당 내에서 반란표가 나온 것이다. 그 이유는 통일 후 밝혀졌다. 슈타지의 대외정보국장으로 있으면서 '서독 공작'을 총지휘한 마르쿠스 볼프가 당시 율리우스 스타이너 등 기민당 의원에게 1인당 5만 마르크씩 지급했다고 말했다.
브란트의 정치적 몰락도 동독의 공작이다. 1974년 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임이 드러나면서 브란트는 사임했다. 서독 방첩기관은 기욤을 체포하기 전부터 정체를 포착하고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기욤도 이를 알고 슈타지에게 알렸지만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기욤을 그대로 둬 체포되는 것을 방치했다.
그 이유는 브란트의 동독 내 '인기'였다. 브란트는 문재인 대통령과 달랐다. 동독과 협력하되 동독 주민의 편에 서서 동독 정권과 대립해야 할 때는 대립했다. 이 때문에 브란트에 대한 동독 주민의 신뢰는 매우 깊었다. 호네커는 이에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F-35A 스텔스기 도입 반대 시위를 한 간첩단 사건은 남한도 부지불식간에 북한의 공작에 교란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는다. 노무현 정부 19명, 이명박 정부 23명, 박근혜 정부 9명이던 간첩 적발 건수가 문재인 정부에 들어 청주 간첩단을 포함해 6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런 우려를 강력히 뒷받침한다. 간첩은 널렸는데 안 잡는다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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