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처럼 정치지도자들이 장기 집권한 선진국은 흔치 않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콘라드 아데나워는 14년(1949~1963), '통일 재상' 헬무트 콜은 16년(1982~1998)간 총리로 재임했다. 반면 독일처럼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선 마거릿 대처의 12년(1979~1990)이 가장 길고, 프랑스에선 프랑수아 미테랑이 7년 중임제 시절 14년(1981~1995)간 대통령을 지냈다.
8일 공식 퇴임하는 앙겔라 메르켈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첫 독일 총리이지만 역대 최장수 총리라는 새로운 역사를 쓸 뻔했다. 2005년 11월 취임 뒤 만 16년이 지났는데, 콜 전 총리보다 열흘가량 재임 기간이 짧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초'란 수식어 붙이기 좋아하는 한국이라면 꼼수를 써서라도 신기록을 만들지 않았을까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높은 지지도를 유지한 채 퇴임하는 그는 독일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독일인들의 '포스트 메르켈 시대'에 대한 불안감은 그래서 더욱 큰 것 같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새로 출범하는 사상 첫 3당 연합정부가 코로나19 팬데믹, 인플레이션 심화 등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찍 좌초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총리 호칭과 관련해 올라프 숄츠 신임 총리에게 'Bundeskanzler'란 남성형 명사 대신 여전히 'Bundeskanzlerin'이란 여성형 명사를 쓰는 실수가 잦을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오랜 세월 친숙했던 메르켈이지만 우호적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화, 연금 개혁 등 미래에 대비한 과제는 질질 끌기만 하고 해결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유능한 중도주의자로서 유럽연합(EU) 최고의 위기관리자로 자리매김했어도 장기적인 도전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은 독일 앞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지난 9월 총선 직전 여론조사에서 정권 교체를 원하는 유권자가 66%에 이르렀다는 점은 그 방증이다.
'무티(Mutti·엄마) 리더십'이란 표현 역시 그의 퇴장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다만 독일 최초의 '여성' '동독 출신' '물리학 박사' 총리로서 그가 남긴 영감(靈感)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독일 첫 여성 국방장관을 역임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독일 첫 여성 외교부 장관이 된 안나레나 배어복 녹색당 공동대표 등의 행보가 특히 주목된다.

중요한 것은 '최초'가 아니라 인물의 그릇 크기를 알아보는 안목이다. 콜 전 총리는 동독 신생 정당 대변인 출신인 37세 메르켈을 통일 내각 첫 여성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산부인과 의사 출신인 폰 데어 라이엔은 메르켈 1, 2기 정부에서 여성부, 노동부 장관을 지내면서 진보적 성향 때문에 메르켈과 충돌했음에도 3기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이란 요직에 중용됐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정치판에도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야가가 호들갑을 떨며 '고3 여학생' '장교 출신 워킹맘' '사할린 동포 3세 여성경영인' 등을 앞다퉈 선거대책위원회에 끌어들이면서다.
표심 공략 포석이라는 걸 모르는 이 없겠지만 부디 이들에게 메르켈 같은 정치 거목으로서 자질이 있기를 바란다. 매표(買票)를 위한 얼굴마담이 아니라 강고한 유리 천장을 깨부술 날카로운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여성 비율이 높았지만 기대감은커녕 분란만 일으켰던 현 정부 여성 정치인 선배들처럼 되지 않기를 염원한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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