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한 것은 건강했던 사람이 염려증에 걸린다는 사실이다. 건강함이라는 걸 온전하게 체험해본 사람이라야 작은 나쁨을 분명하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친구 셋이 울릉도에 간 적이 있었다. 둘은 평소에도 좀 약골이었고 한 명의 정도는 잘 몰랐다. 우리는 성인봉을 넘기로 했다. 새벽녘에 출발하여 오후에 바닷가에 도착했다. 해발 1천 m 정도의 산을 넘어 해발 0에 도착하는데, 예닐곱 시간이 걸린 셈이다. 사실 등산은 예상한 대로였다. 하지만 나리분지에서 항구로 가는 내리막엔 녹두 같은 잔돌이 흩뿌려져 있어 무척 미끄러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길.
약골인 둘은 너무나 힘겨워 입맛도 잃어버렸다. 쉬어야 했다. 하지만 건강한 친구는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 친구는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모두에게 먹이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까지 했다. 그날 나는 튼튼하다는 정도와 그것의 편차를 알게 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중년이 되자 건강했던 친구의 건강 타령이 시작되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보다 훨씬 튼실한 친구인데, 욕심꾸러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좀 지나 알게 되었다. 친구에겐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몸의 감각이라는 완전히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고유성을 몰랐던 건, 바로 나였다.
감각이란 순간적이다. 인류는 그렇게 진화돼 왔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으로 느끼는 세계를 의식이 통합해 다시 분류하고 판단하는 활동까지. 그렇게 우리의 오감이 발달한 것이다. 원시의 들판을 뛰어다니던 인류가 예민하고 순간적인 감각기관을 통해 먹거리나 위험을 감지하는 건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친구는 조금이라도 건강하지 않게 변한 자신의 위나 심장을 견딜 수 없었다. 오랫동안 약체로 살았던 둘은 자신의 몸에 적응하는 게 최선이었는데, 건강했던 친구는 이후 십년간 수많은 건강보조식품과 의료기기를 사들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병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수긍하는데 필요한 통과의례였다.
사람은 맛이나 소리를 상상하기 어렵다. 작년의 날씨를 떠올려 보자. 너무 아득하지 않은가. 다만 어제나 그저께를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그것도 옷차림이나, 너무 더워 에어컨 바람을 쐬러 황급히 들어갔던 편의점의 위치와 발자국이 남던 아스팔트도로 같은 것을. 물컹한 그 도로가 아래로 내려앉을 것 같았던 공포도 떠오른다. 하지만 땀으로 끈적이던 피부의 감촉은 아무리 해도 다시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는 현재 방의 온도가 소설 속 계절이 된 적이 많았다.
사람은 자신만의 몸에 갇혀 살아가기에 타인이 느끼는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체험과 비교하여 상상 속의 고통을 짐작할 뿐이다. "아프겠다!" 얼마나 다정한 표현인가. 가끔 사람의 뛰어난 공감능력은 신체의 특정부위에 찌릿한 신호를 주지만 감각의 속성으로 보아 그건 가짜일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염려증은 개체적이며, 단 하나의 영역에 대한 완전한 오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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