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해이다. 난생처음 외국 생활을 했었고, 한·일 월드컵을 보았고,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였다.
1986년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한 해도 쉬지 않고 근무하다가 2002년 2월에 남편이 일 년간 중국 상해에 나갈 기회가 생기자, 동반 휴직을 신청하고 출국길에 오르며 내심 신이 났었다. 친정아버지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가 우리 가족의 부재를 몹시 섭섭해하셨지만, 그 당시의 나는 육친의 상황이나 심경보다는 나에게 다가올 달콤한 휴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컸다.
직장 생활 16년 만에 갖는 휴식은 정말로 귀했다. 두 아이를 소학에 보내 중국어를 배우게 하는 것도 뿌듯했고, 자전거 타고 낯선 거리를 달리는 것도 재미있었고, 아이들 방학을 맞아 상해에서 내몽고까지 한 달 넘게 여행을 다니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마침 월드컵이 한창이라 여행지 식당 TV로 경기를 관전하던 중에 기차를 타야 할 경우, 다음 여행지에서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궁금했던 경기 스코어를 묻기도 하였다. 여행 중 잠시 들른 북경 한인타운 왕징의 친척 아파트에서는 한국 교민들과 '대~한민국' 함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나날이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니 편찮으신 내 아버지도, 외로워하시는 시어머니도 한동안 잊었다. 장기간의 아버지 병간호에 지친 어머니가 며칠 상해에 오셔서 관광하시는 대신에 잠만 주무시고 가실 때도 어머니를 믿는 마음에 아버지 걱정을 별로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생활하기에 바빴으므로 내 관심사에서 아버지는 외국 풍물 다음이었고 심지어 월드컵에도 밀렸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 체류 일수가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하며 잘 지내던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아이들을 지인에게 맡기고 남편과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평소 철저하고 꼼꼼한 습관을 가진 남편이 여권을 잘못 챙겨와 공항에서 허둥거렸을 정도로 우리 부부는 정신이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대구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병든 아버지를 완전히 잊고 산 지난 시간이 그제서야 보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키우고 공부시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부모의 존재가 자식에게는 희미한 과거로 머물러있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조문 온 직장 동료들과 만나고 장례식을 치르고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두고서 상해로 돌아갔다.
귀국할 때까지 석 달 동안 아버지에 대한 가슴 먹먹한 그리움이 뒤늦게 찾아왔다. 어린 시절부터의 내 행적이 하나씩 떠오르고 성장 과정에 일일이 동행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함께 생각나면서 베갯잇이 젖도록 울었다. 추억이 사무치는 날, 아버지가 너무 그리워서 소리죽여 우는 나를 남편이 애달픈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늦장가 들어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는데 내가 첫 정인지라 남동생보다 편애하셨다. 박봉에도 퇴근 때마다 빠짐없이 과자며 장난감을 사와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셨다고 한다. 면 소재지의 국민학교 시절, 내가 글짓기 대회나 웅변대회에 출전하러 이따금씩 읍으로 나갈 때면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모 동행을 하며 열성을 보이셨다. 고교 시절 집이 멀어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내게 찾아오셨다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가다가 되돌아와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도넛을 한가득 사서 방에 넣어주셨던 기억이 난다. 대학 졸업반 때 진로를 고민하며 이리저리 뛰어 다닐 때, 건강 해치지 마라 위로해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생생하다.
부모 자식 간 그리움의 시간은 왜 일치하지 않는지 안타깝고 후회스럽다. 부모가 자식을 그리워할 때 자식은 무관심하고 자식이 뒤늦게 부모를 그리워할 때 부모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장성한 내 자식들도 나처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의 시간을 다르게 겪을지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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