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달성군에 낙향할 것이라고 한다. 퇴원 후 박 전 대통령이 기거할 것으로 알려진 쌍계리 집에는 벌써부터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탄핵되고 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아직도 "우리 대통령"이다. 그 애틋한 마음이 아이돌을 향한 '팬덤'(fandom)마저 연상케 한다.
대구경북에는 박근혜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눈물 글썽이는 어르신들이 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박정희·육영수에 대한 그리움과 두 부모를 흉탄에 잃은 비극적 가정사에 대한 연민이 있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면 심리적 동일시 현상이 생긴다. 좋아하는 대상의 성공 또는 실패는 곧 자신의 행복 또는 불행이다. 박 전 대통령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자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듯한 심리적 상처를 입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망령 하나가 떠돌고 있다. '복수심'이다. 박 전 대통령의 불행에는 적폐 청산을 가장한 현 집권 세력의 정치 보복이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엄존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 박영수 특검이 경제 공동체라는 혐의를 적용해 단죄한 것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따른 복수심은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과 내로남불식 행태에 대한 증오심과 화학적으로 결합했다.
증오는 파괴적이고 정치를 퇴행시킨다. 우리 정치사에서 유권자들의 복수심을 만들어 낸 비극적이고도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다. 보수 진영 지지자들이 박근혜에 대한 단죄를 정치 보복이라고 여기듯, 진보 진영 지지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 보복이 개입돼 있다고 믿는다. 진보 진영의 복수심은 여기서 시작됐다.
성난 민심의 완충 역할을 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반대의 길로 갔다. 촛불 민심의 위세에 압도당한 나머지 민심에 아부하거나 성난 민심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활용한 정치인들이 수두룩했다. 결국 보수 정권 전직 대통령 2명이 잇따라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누구에게는 당연한 적폐 청산이지만 반대 진영에는 정치 보복 프레임으로 비쳤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정치 보복 논란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런 뉘앙스로 해석될 발언을 한 것을 놓고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를 요구하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다. 윤 후보는 대통령이 되더라도 정치 보복은 않겠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진보 진영 지지자들은 집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길지 않은 헌정사에 우리나라는 역대 대통령 9명 중 대다수가 쫓겨나거나 퇴임 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 가히 대통령 잔혹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수정 추기경은 최근 윤 후보를 만난 자리에서 "보복은 보복으로 끝나고 보복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가톨릭계 원로인 염 추기경의 말을 윤 후보는 마음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혹여나 문 대통령이 퇴임 후 고초를 겪게 된다면 이는 또 다른 복수심을 잉태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임기 5년짜리 대통령은 국민들 복수심 앞에 누구도 안전한 퇴임 후 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는 대한민국이 가야 할 미래가 아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시대적 갈증'을 채워줘야 할 적임자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시대적 갈증이 '정치 보복'일 수는 없다. 누군가는 그 사슬을 이제 끊어야 한다. 윤석열도 그중 한 명이다. 그게 그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