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이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를 'G-카디건'이라 했다. 연대장의 애칭이다. 70년대 초반 제2보병사단의 연대장이던 G대령은 권위주의를 털어버리고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는 수범적인 지휘관이었다.
군단에서 주관하는 전투력 시험훈련 날짜가 가까이 다가오자 연대장이 긴급하게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훈련의 강도를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모두들 성공적인 훈련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라.
연대장의 지침이 떨어지자 1대대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름철 상황을 고려하여 각개 병사들의 개인위생에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러자 뒤이어 중대장과 대대장들이 각기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전투훈련 때마다 귀찮은 것이 위장 작업입니다. 개별적인 복장이나 각종 군장비를 대항군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일은 훈련준비의 하나인 만큼 각 제대별로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G-카디건의 부하사랑
실전적인 훈련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억새와 잡풀을 맨손으로 뜯어서 자신의 몸이나 철모 등 개인 장비에 심듯이 꽂는 위장방법을 무척 귀찮게 여겼다. 전투 훈련 준비과정의 하나로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위장 작업이지만 그런 방식은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훈련에 집중하는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단점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장망이나 위장포가 군수품으로 지급되지 않던 현실이었다.
시종일관 회의진행 과정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연대장이 '훈련에 필요한 위장망의 종류와 소요량을 파악하라. 그것을 민간업체에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검토해보라!' 하고 회의를 마무리하였다.
연대장은 훈련 준비과정에서 장병들이 겪는 고충을 백분 이해하였기에 기계로 제작한 위장포와 위장망을 이용한다면 장병들의 고충을 덜고 오직 훈련에만 몰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마침내 연대장, G대령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 맞춤형 위장망을 구입하고 장병 개개의 전투복과 장비를 손쉽게 위장하게 하였다.
지휘관의 하심어린 손길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투에 집중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훈련 이후 부하들이 연대장에게 붙인 별명이 'G-카디건'이다. 무한한 신뢰와 존중의 표현이었다. 훗날 G-카디건은 장군으로 진급하였는데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 파격을 아끼지 않은 임무중심의 지휘관으로 그 당시 종종 회자 되었다.

◆전쟁속에서 탄생한 카디건
사실, 카디건의 탄생 이야기는 19세기 중엽 흑해 연안의 분쟁지역인 크림반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 시대가 몰락하자 그 틈새를 타고 러시아는 유럽 대륙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지중해로 나아갈 출구를 갖기 위한 욕심이었다. 1853년 7월, 러시아가 도나우강 연안의 루마니아를 점령하자 자신의 이마에 총부리를 겨냥한 형국이 된 투르크(터키)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영국의 지원을 받던 터키는 러시아에 강경하게 맞선다. 마침내 1853년 9월, 영국 함대가 이스탄불로 출발하자 터키는 흑해 해안에 머물러 있는 러시아 함대를 무차별 공격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터키와 영국, 프랑스 등이 연합군을 결성하고 흑해 북쪽 해안에 있는 크림반도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크림전쟁(Crimean War)이다.
1853년부터 56년까지 4년 동안 러시아와 유럽 연합국간에 벌어진 이 전쟁은 쌍방간에 수많은 사상자를 낸 지긋지긋하고 치열한 소모전이었다. 당시 영국의 손꼽히는 부자 가문인 카디건 백작 7세로 얼떨결에 참전하게 된 제11기병단장 제임스 토마스 부르데넬 카디건(J.T.Brudenell)은 크림반도의 요충지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치명적인 실패와 사상자를 냈지만 자신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다. 명철한 지휘 임무의 수행 여부와 무관하게 언론과 대중들이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자기도취에 젖은 명장(?)을 탄생시켰다.
흑해 연안의 바람은 매서웠다. 전투력보다는 명성을 중요시했던 백작은 엄청난 사비를 들여 칼라가 없고 앞섶을 튼 니트로 스웨트를 만들어 자신은 물론 병사들에게도 입혔다. 전장에서 돌아와서도 손으로 짠 니트 스웨트를 즐겨 입었는데 백작의 이러한 패션은 세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기다 전상병들이 옷을 갈아입기가 편하고 또 전장의 추위를 막아주는데 안성맞춤이었다는 자신의 스토리까지 가미되어 마침내 패션의 멋으로 그려졌다.
그 옷은 결국 부르데넬 카디건의 패션센스와 귀족의 이미지가 더해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현재까지 백작의 이름 따서 카디건이라 부르고 있다.
150여 년 전, 크림전쟁은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부르데넬이 남긴 카디건은 불변의 패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볍게 입을 수 있는 따뜻한 옷, 입어서 태가 나는 옷 카디건으로 말이다. G-카디건 대령은 우리 병영에서 조차 잊혀진 이름이 되었지만 크림전쟁이 낳은 백작 카디건의 유산은 고스란히 일상 속으로 들어 앉아있다. 전쟁이 낳은 하나의 뚜렷한 유산이 되어.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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