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비워 두고 싶은 마음

김은경 프리랜서 편집자
김은경 프리랜서 편집자

언제 적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인테리어 잡지 속에서 본 사진 한 컷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한지 바른 창호지로 은은한 햇살이 비치고 방 안에는 아무 살림살이도 없이 아담한 반닫이 하나만 차분히 놓인 풍경이다.

별다른 장식 없이 나뭇결만 살린 반닫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만, 한지를 바른 벽면이 햇살을 잔뜩 머금고 그윽하니 환한 것이 몹시 매력적이었다. 방도 따스하고 냄새마저 따스할 것 같아 보는 순간 어지간히 마음에 쏙 들었다.

옆에서 함께 잡지를 들여다보던 친구에게 무척 좋다고, 이런 방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웃었다.

"야, 이게 말이 되냐? 이불은 어디 둘 건데? 옷은 어디 걸고?"

아마 살게 되면 저 반닫이 위에 이불이 쌓일 거고, 저 텅 빈 벽에 옷걸이가 박힐 것이고, 그 옷걸이 아래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뒹굴 거라는 말에 쳇, 못마땅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 상허 이태준은 '벽'이라는 작품에서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라고 썼다. 그가 말하는 탐나는 벽은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안다. 그렇게 한쪽 벽 한 칸 비워두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활의 공간에서 벽 한 칸을 휑하니 비워둘 수 있는 여유는 내 처지에선 불가능에 가깝다.

이태준 작가의 바람처럼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라도 한 폭 걸어두고 여백을 즐기려면 확고한 취향과 단호한 결정, 거기에 경제적 여유까지 필요하다고 이런저런 이유와 구실을 떠올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에서 좀체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처럼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 한 칸을 꿈꾼다.

벽 한 칸을 오롯이 비워두고 싶은 것처럼 마음 한 켠도 온전히 비워 두고 싶다. 비워두고 싶으나 좀체 비우기 힘든 벽처럼, 마음 한 켠도 온전히 비워두는 것이 참 쉽지 않다. 한 켠 정도는 늘 비어 있어서 이런저런 마음이 들고나더라도 크게 복닥대거나 크게 허한 일 없이 바람결 잘 통하는 여유로운 마음이 갖고 싶다.

여백과 여유. 그렇게 비어있는 것들이 주는 충족감이 있다. 비어 있어서 안정되고 편안한 마음, 이것이 정상이지 싶은 마음,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마음. 그런 무던한 충족감은 공간이든 마음이든 적당히 비워둔 곳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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