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못 배운 어미는 밤새 소리 없이 울었다”…7080 할머니들 늦깎이 한글 공부

글 몰라 '새우 그림' 보고 '튀김 가루' 사는 7~80대 할머니들, 못 배운 한(恨) 푼다… 한글 배운 뒤로 간판도 읽을 수 있고, 은행 업무도 볼 수 있어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恨)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恨)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소 먹일 풀을 뜯으며 자식들을 키우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의 주름진 손이 떨렸다. 못 배운 한(恨)을 풀고자 70, 80대 할머니들이 책걸상에 앉아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23일 오전 10시쯤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의 1교시 받아쓰기 수업 시간.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할머니들이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고정조(60) 강사가 1번 문제를 큰 소리로 말한다. "모범 점원으로 근무하다."

수강생 중 최고령자인 김상순(86·대명동) 할머니가 오른손을 높이 든다. "선생님, '모' 자는 '윷' 다음에 나오는 '모' 자 맞지요?" 강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 할머니는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앞에 두고도 글자를 몰라 어느 게 '튀김가루'인지 알 수 없어서 포장지 겉면에 '새우 그림'이 나오면 튀김가루로 알고 썼다. 또 식용유는 '콩 그림'을 보고 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더듬더듬 읽고, 글자 모양 따라 쓰고 있지만 글 배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지난 2017년 개관한 문해학당에서 한글을 배운 어르신들은 "가난 때문에, 또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보고 까막눈으로 살면서 늘 답답하고 부끄러웠는데 늦게나마 한글을 배운 뒤로 간판도 읽을 수 있고, 은행 업무도 볼 수 있어 이젠 세상 살맛이 난다"고 말했다.

박복순(82·봉덕동) 할머니는 "배우지 못해 창피하고 쑥스러웠던 어미인데 그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만이라도 가르치겠다고 파출부로 일하면서 밤새 소리 없이 울었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 할머니는 "책가방 들고 학당 가는 길이 꿈만 같다.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워 "참 행복하다"고 했다. 문해학당의 청일점인 최혁재(52·봉덕동) 씨는 "어렸을 때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그만뒀다"며 "이제 열심히 공부해 중학교 졸업장을 받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恨)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恨)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이렇게 한글을 익힌 어르신들은 오는 6월에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전국 시화전과 10월에 열리는 백일장 대회에 참가해 그동안 갈고닦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낼 예정이다. 남구청은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문해학습 활성화 사업을 하고 있다.

조재구 남구청장은 "배움의 열정에는 나이가 없는 것 같다. 어르신들이 한글을 익히는 그날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恨)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23일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못 배운 한(恨)을 풀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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