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소 먹일 풀을 뜯으며 자식들을 키우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의 주름진 손이 떨렸다. 못 배운 한(恨)을 풀고자 70, 80대 할머니들이 책걸상에 앉아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23일 오전 10시쯤 대구 남구 평생학습관 문해학당의 1교시 받아쓰기 수업 시간.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할머니들이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고정조(60) 강사가 1번 문제를 큰 소리로 말한다. "모범 점원으로 근무하다."
수강생 중 최고령자인 김상순(86·대명동) 할머니가 오른손을 높이 든다. "선생님, '모' 자는 '윷' 다음에 나오는 '모' 자 맞지요?" 강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 할머니는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앞에 두고도 글자를 몰라 어느 게 '튀김가루'인지 알 수 없어서 포장지 겉면에 '새우 그림'이 나오면 튀김가루로 알고 썼다. 또 식용유는 '콩 그림'을 보고 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더듬더듬 읽고, 글자 모양 따라 쓰고 있지만 글 배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지난 2017년 개관한 문해학당에서 한글을 배운 어르신들은 "가난 때문에, 또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보고 까막눈으로 살면서 늘 답답하고 부끄러웠는데 늦게나마 한글을 배운 뒤로 간판도 읽을 수 있고, 은행 업무도 볼 수 있어 이젠 세상 살맛이 난다"고 말했다.
박복순(82·봉덕동) 할머니는 "배우지 못해 창피하고 쑥스러웠던 어미인데 그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만이라도 가르치겠다고 파출부로 일하면서 밤새 소리 없이 울었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 할머니는 "책가방 들고 학당 가는 길이 꿈만 같다.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워 "참 행복하다"고 했다. 문해학당의 청일점인 최혁재(52·봉덕동) 씨는 "어렸을 때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그만뒀다"며 "이제 열심히 공부해 중학교 졸업장을 받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이렇게 한글을 익힌 어르신들은 오는 6월에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전국 시화전과 10월에 열리는 백일장 대회에 참가해 그동안 갈고닦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낼 예정이다. 남구청은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문해학습 활성화 사업을 하고 있다.
조재구 남구청장은 "배움의 열정에는 나이가 없는 것 같다. 어르신들이 한글을 익히는 그날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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