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삼절의 부활을 기다리며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네."

중국 당나라 왕유(王維)는 산수시를 운치있게 지었고, 산수화와 서예에도 정통했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시불'(詩佛)로 불렸다. 이런 왕유의 작품을 보고 북송 때 시인이자 예술가이며 정치가였던 소식(蘇軾)이 평가한 말이다.

예로부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빼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현종이 정건(鄭虔)의 시·서·화가 절묘하다고 극찬하면서 '정건삼절'이란 칭호를 내리면서 삼절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문인 사대부 등 지식인들이 시·서·화를 겸비한 삼절을 지향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삼절은 문인들의 이상향이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삼절로는 당나라의 정건과 왕유, 송의 소식, 원의 조맹부 등이고, 우리나라는 강희안, 윤두서, 강세황, 신위, 김정희 등을 꼽을 수 있다.

소식은 "대나무를 그리려면 반드시 먼저 마음(가슴)에 그리려는 대나무의 온전한 형상을 갖춰야 한다"면서 흉중성죽(胸中成竹)을 설파하였다. 이는 마음 속의 대나무를 속도감 있게 종이 위에 그린다는 의미이다. 곧 왕희지가 "글씨를 쓸 때는 뜻(의도)이 붓 앞에 있어야 한다"는 의재필선(意在筆先)과 일맥상통하는 창작원리이다. 그는 호방한 시와 자유로운 글씨, 의경을 살린 그림을 통해 진정한 삼절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의 신위(申緯)도 시·서·화에 모두 절묘한 삼절로 불린다. 글씨는 동기창체에 능하였고, 대나무 그림은 유덕장 이래 최고였으며, 시는 김택영이 '조선 500년에 빛나는 대가'라고 부를 정도로 당대의 일인자였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삼절이 드문 이유는 무엇일까. 시는 문학에서, 글씨는 서예에서, 그림은 회화에서 떼어가 갈기갈기 나눠버린 서양식 교육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동양에서는 원래 문학, 역사, 철학이 인문학의 영역에서 함께 다루어졌다. 최근 학제간연구(學際間硏究), 통섭(統攝)을 강조하는 게 동양의 과거 공부 방법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다가와 씁쓸하다. 또한 예술방면에서도 융합이니 콜라보니 크로스오버니 하는 걸 보면 서양을 따라 하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에게 원래 있었던 삼절이 부활할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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