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저희 곁을 떠난 지 4년이 됐네요. 그 곳에서는 늘 안녕하시죠?
얼마 전에 할머니의 그림을 범어역에 있는 '범어아트스트리트'에 전시했어요. 다들 할머니 그림을 보고 "곱다", "예쁘다", "그림을 한 번도 배우지 않으신 분이 이런 그림을 그리다니 대단하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동그란 탁자에 둘러앉아 손자 손녀들이 쓰던 종이, 싸인펜, 크레용, 수채물감, 반짝이 등을 가지고 차분히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이요. 저희들 돌보느라 몸도 힘드셨을텐데 할머니는 그림그리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틈틈이 종이 위에 알록달록한 꽃밭을 꾸며나가셨죠.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 저 멀리 꿈 속에서 오듯이 오는 꽃, 벌, 나비, 새들과 여러 동물들, 얼굴들, 풀, 나무들과 산들을 반기는 듯했어요. 어느정도 커서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늘 새로이 시작하는 생명의 자연, 그 아름다움을 꿈꾸듯 반기는 애틋한 눈길이 느껴졌죠.
할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든 맑고 깊은 밤의 고요함 속에서, 때로는 잠든 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의 적막함 속에서, 때로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속에 깨어나는 한낮의 조용함 속에서, 영혼의 눈을 깨우듯 가만히, 차분한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셨어요. 저는 할머니가 차분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그림 그리기는 그렇게 십년 가까이, 병상에 몸져 누우실 때까지 계속됐었죠. 그 때까지 그린 할머니의 그림은 무려 400여점에 이르렀구요.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머니는 할머니의 손에 다시 컬러펜을 쥐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 마냥 즐거워하셨죠. 색(色)의 세계를 되찾은 기쁨 때문이셨나요, 정말 펜을 놓지 않고 병상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셨죠.
오죽하면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가 그림 그리다가 건강을 해치실까 걱정한 나머지 펜과 스케치북을 이따금 할머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두곤 했을 정도니까요.
하늘에서 듣고 계신다면 대답해주세요. 할머니께 그림은 과연 무엇인가요? 다채로운 색들로부터 할머니가 눈을 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무슨 구원의 빛줄기라도 되어주나요? 바느질 벗 삼던 우리네 여느 늙은 여인들의, 네가 이기느냐 내가 이기느냐 해보자며, 어렵사리 바늘구멍에 실 꿰는 그 침침한 눈이 그러하였습니까?
할머니의 그림을 세상에 보여주니 사람들은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평온을 느끼나봐요. 다들 "평온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니까요. 마음을 비우면 평온하다고 말하지만, 평온한 마음이 나른한 마음은 아닐 터이고, 무심한 마음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저편으로 향하며 길을 열어가려고 애쓰는 가운데, 마음은 마음을 비우는가요? 길을 열어가려고 애쓰며 비우는 마음 가운데, 평온한 마음이 깃드는가요?
평온함 속에 마음을 다하니, 이를 저희들은 '기원하는 마음'이라 이름붙이기로 했습니다.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옳음 속에서 미치지 못함이 미침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기원하는 마음으로 외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독송 소리는 끝내 할머니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그림 꽃밭은 이제 저희 가족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꽃밭이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아파트 밑에서 기르시던 작은 상추밭의 상추들처럼 꽃들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졌습니다. 누군가에겐 감동을, 누군가에겐 눈물을,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 감격스러운 그림 꽃밭을 세상과 나누며 할머니의 기원하는 마음을 배워봅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남기신 그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온을 얻고 가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가 저희를 떠나 계신 그 곳에서 평온하게 계시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후손들은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영원히 할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거예요. 그 곳에서 평안히 계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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