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흐르는 범어천 조성'. 6·1 지방선거 당시 대구시 수성구에 걸린 선거 현수막 중 하나였다. 김대권 수성구청장 후보가 내놓은 동네 맞춤형 공약이었는데, 재도약·영광·○○산업 유치·돌봄·일꾼 등 주변의 선거 현수막들 사이에서 왠지 낯선 느낌을 주었다.
시인도 많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시(詩)는 먹고사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주제다. 불특정 다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구청장 후보가 '시가 흐르는 범어천'을 공약으로 내건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설마하니 재선에 도전하는 김 후보가 뜬금없는 공약을 들고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김관용 경북도지사 후보는 대구 시내 빌딩 외벽에 '지발 좀 묵고 살자'는 커다란 현수막을 걸었다. 경북에 부모나 친족이 있는 대구 시민을 염두에 둔 외침이었을 것이다. 밥(食)과 시(詩) 모두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둘 사이의 거리는 멀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 효율과 속도에 매달려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시를 읊조리기는 어렵다. '시'는 먹고사는 문제 너머의 이야기, '효율성'이나 '양'(量)을 평가 기준으로 삼지 않는 세계다.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쓰기 위해서고, 밥을 먹는 것은 '시'(詩)를 누리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시'라는 낱말을 사랑, 낭만, 기쁨, 배려, 여가, 존중 등 사람이 누리고자 하는 가치로 치환하면 쉽게 와 닿는다.
지난해 대구시 수성구청의 행정 수요 조사에 따르면, 수성구의 희망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 구민 66.9%가 '문화가 있는'을 꼽았다. 예술가나 특정 계층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 '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양적·기능적 성장과 다른, 새로운 '전환'(轉換)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부모님 세대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한 것은 자식 세대는 그런 고생을 겪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가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렸던 것은 자식 세대는 '먹고사는 문제' 너머를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불특정 다수 유권자들에게 '시'를 공약으로 내걸고, 평범한 시민들이 '시'에 귀 기울이는 모습, 우리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이 낯선 모습이 낯설지 않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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