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치인 네스키 부부가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범인은 첩보원인 '제이슨 본'이다. 부부 싸움 끝에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아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위장한다. 네스키 부부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다. 제이슨은 성인이 된 딸을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내가 부모님을 죽였고 그게 내 임무였어.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게 달라지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는데 진실을 알아야지. 미안해."
제이슨의 눈에 그때까지 딸이 갖고 있던 단란한 가족사진이 들어온다. 가족은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딸은 부부가 서로를 죽이려 했다는 관계 기관의 사고 경위 설명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2004년 개봉된 영화 '본 슈프리머시'는 기억을 잃은 제이슨 본이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대표적인 액션 영화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초점은 사죄에 있다. 옛 기억을 살리며 알게 된 비인도적 살인을 참회하면서 고통을 겪은 유족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학이, 그림이, 영화가 제아무리 현실에 바탕을 뒀다 해도 핍진성 있는 작품일 뿐이다. 2020년 9월 22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해상에서 있은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원 이대준 씨 사망 사건은 분명 '피살 사건'이었다. 정부는 이 씨가 인터넷 도박에 깊이 몰입했었고 빚이 많았다는 점까지 굳이 거론하며 월북 시도로 해석했다.
심지어 피살 후 시신마저 훼손돼 수습이 안 됐는데 북한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사과했다는 데 방점을 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만 나오지 않았지 '이렇게 빨리 반응해 줘 고맙다'라는 뜻으로 읽혔다. 석연치 않은 죽음에 대처하는 저자세가 바람직한 남북관계의 지렛대라도 된다는 것일까.
가족이 '함께 살아온 세월'이라는 게 있다. 오랜 기간 함께 경험한 행동 패턴이 있기에 예측 가능한 순서도처럼 전후 사정을 읽어낸다. 유족들이 정부 발표를 못 믿고 정보공개청구를 했던 까닭이다. 확인해 보자는 요청은 인륜에 합치하건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슨 짓이냐"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급한데 이게 왜 현안이냐"라는 말이 나온다. 허기진 서글픔이 밀려온다. 공감 능력을 강조하던 이들에게 유족의 심정이 전해지지 않는다. 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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