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비대위, 호박에 줄 긋기

국민의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 등 비대위원들이 지난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당 상황에 대해 사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 등 비대위원들이 지난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당 상황에 대해 사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해용 논설주간
김해용 논설주간

대한민국 국회 원내 1·2·3당 모두가 목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다. 세계 정치사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비상대책위원회는 긴급한 위기 상황일 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로 만드는 임시 기구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에서 비대위는 상투적인 이름이 돼 버렸다. 하도 남발되다 보니 감동이나 신선함 따윈 없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한나라당, 새누리당, 미래통합당을 포함해 지금까지 무려 여덟 차례의 비대위를 꾸렸다.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도 2016년 이후 비대위 체제만 다섯 번이다. 거대 정당과는 무언가 달라야 할 정의당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비대위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국회 1·2·3당이 지금까지 열다섯 번의 비대위를 꾸렸으니 이 정도면 '중독'이나 마찬가지다.

비대위 체제로 가는 대부분의 이유는 선거 패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정당들은 선거만 졌다 하면 비대위 직행이다. 반성하고 새로 태어나겠다며 비대위를 구성한다고 하지만 그건 보이는 모습일 뿐이고 실상은 당 지도부 교체 과정이다. 본질적으로는 당권 장악을 위한 계파 갈등 혹은 권력 투쟁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남발하는 비대위는 국민에게 호박에 줄 긋기로 비친다. 어차피 정치는 일정 부분 쇼라지만, 적어도 절박함과 진정성이라도 내비쳐야 한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패배하고 노무현 탄핵 소추 역풍을 맞았을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박근혜 대표 주도로 당사를 천막으로 옮겼다. 물론 그 조치로 한나라당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았지만 당의 절박함을 국민에게 어필하기엔 충분했다.

지금은 어떤가. 우상호 민주당 비대위원장은 국회 1·2·3당 모두가 비대위 체제인 것과 관련해 "그만큼 대한민국 정치 상황이 심각하며 반성을 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소가 웃을 소리다. 민주당은 올해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하자 비대위를 출범시켰는데, 정작 선거 패배 책임을 져야 할 패장(이재명 의원)에게 당권 장악의 길을 터 주는 격이 되고 있다.

국민의힘은 더 가관이다. '윤핵관' 중의 '윤핵관'인 권성동 원내대표가 16일 의원총회에서 재신임을 받은 데 이어 당 대표 출마설까지 나돈다. 비대위라면 당이 합심해야 하는데 전직 당 대표(이준석)는 여전히 '내부 총질' 중이다. 당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고 전당대회를 여는 것이 지금까지의 비대위 관행인데, 비대위 출범 적법성을 놓고 법원 판단을 기다리는 꼴사나운 모습마저 연출하고 있다.

말만 비상대책위원회이지 여야 할 것 없이 '비상'과 '대책'은 안 보인다. 혁신과 개혁은 말뿐이고 특정 세력들의 당권 장악을 위한 통과의례로 비대위가 악용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 정치판의 비대위는 사실상 그들만의 당권 리그다. 우리 정치사에 열다섯 번의 비대위가 있었지만 정치판은 나아지지 않았다. 비대위가 한 번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2011~12년 KBS2 TV 개그콘서트 인기 코너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각난다. 관료들의 보신주의와 책임 회피를 신랄하게 풍자한 코너다. 여기서 개그맨 김준현은 "고뢔~? 그러면 사람 불러야 되겠지?"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우리나라 정치판의 비대위가 딱 이 꼴이다. 습관화된 비대위는 대한민국 정치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이러다가는 비대위를 성공시키기 위한 비대위를 만들자는 소리마저 나오겠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