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아직도 사실로 믿는 한국인들, 그날 무슨 일이…

태프트-가쓰라 '각서 동의'를 '밀약'으로 오역…교과서에 살이있는 현실
美 태프트 장관 日 가쓰라 총리 만나 극동아시아 관련 단순 대화 내용 정리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에 전보로 송신
역사학자 데넷 '필리핀-한국 맞교환' '미국 외교사상 눈여겨볼 밀약' 오역
에스더스 등 잘못 지적에 당사자 시인
1968년 국내 역사교과서에 첫 등장…발표자 실수 인정에도 진실로 둔갑

태프트 미 육군 장관. 후에 미국 대통령에 오른 인물로서 가쓰라 일본 총리와 태프트-가쓰라 밀약 체결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근대사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사안 중의 하나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일본이 체결했다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이렇다.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육군 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를 도쿄에 파견하여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만났다. 두 사람은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가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는 밀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허구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탄생 배경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런 밀약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였음이 오래전에 밝혀졌다. 허구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탄생 배경과, 그것이 사실로 둔갑하여 유통된 역사적 사실 관계를 추적해 본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 청일전쟁 때는 일본군 제3사단장으로 참전했고, 세 차례 일본 총리를 지내며 한국 병합의 주인공이 되었다.
태프트 미 육군 장관. 후에 미국 대통령에 오른 인물로서 가쓰라 일본 총리와 태프트-가쓰라 밀약 체결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1905년 7월 하순 필리핀을 순방하기 위해 미국을 출발한 태프트 장관은 도중에 도쿄에 기착했다. 7월 27일 목요일 오전 태프트 장관은 가쓰라 총리의 요청으로 만나 '극동아시아 평화 유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세 가지였다.
▷필리핀 문제: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범의사가 없다"라는 내용에 동의했다.
▷극동아시아 평화유지 문제: 가쓰라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영국·미국 상호간에 긴밀한 이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공식·비공식으로 일본과 미국의 협약(혹은 밀약) 체결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발언했다.
▷대한제국 문제: 가쓰라는 한국이 옛날 상태로 돌아가 일본이 또 다른 외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발언했다. 태프트는 이 의견에 동의했고, 개인 의견이지만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말은 일본군이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가지고 일본의 허락 없이 외교를 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극동아시아 평화에 직접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 태프트와 가쓰라의 단순한 대화록을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 청일전쟁 때는 일본군 제3사단장으로 참전했고, 세 차례 일본 총리를 지내며 한국 병합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것이 대화 내용의 전부다. 아무리 살펴봐도 두 사람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을 맞바꾸는 밀약 체결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화 후 태프트 장관은 대화 내용을 각서 형태(memorandum of conversation)로 정리하여 루트(Elihu Root) 미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가쓰라 총리가 이에 동의하여 대화 내용이 각서 형태로 정리되었고, 태프트는 그 각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보로 송신했다.

◆미국 외교사상 가장 눈여겨볼 만한 밀약

그리고 관련 내용은 까맣게 잊혔는데, 그로부터 19년 후 문제가 터졌다. 미국 역사가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 미 의회 도서관의 루스벨트 대통령 자료에서 태프트 장관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각서를 발견했다. 그는 1924년 미국 역사저널 『현재의 역사(Current History)』에 '루스벨트와 일본 사이의 밀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 데넷의 논문이 명백한 왜곡이란 사실을 밝혀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 태프트와 가쓰라의 단순한 대화록을 '밀약'으로 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환상을 창작해낸 주인공이다.

문제의 논문에서 데넷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미국 외교사상 가장 눈여겨볼 만한 밀약"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데넷의 중대한 실수였다. 데넷이 발견한 각서는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했으나, 새로운 발견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학문적 자세를 팽개치고 이것을 양국 간의 '밀약(agreement)'으로 과장했다.
데넷의 논문이 발표된 후 태프트-가쓰라 대화의 형식과 내용의 진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논란의 초점은 첫째, 1905년 7월 29일 태프트가 보고한 전문이 법적인 구속력을 지닌 비밀협정이었는가. 둘째, 과연 이 전문에서 미·일 양국이 필리핀과 한국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는가, 두 가지였다.
여러 학자가 데넷의 논문을 연구 분석한 후 'agreed memorandum'을 'agreement'로 오역하여 미·일이 한국과 필리핀을 맞교환하는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한 것은 착각이고, 이것이 미국이나 일본의 정책을 바꿨다는 것도 데넷의 오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한 비판의 결정판은 1959년 미국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Raymond A. Esthus)가 발표한 「태프트-가쓰라 협정-사실인가 신화인가?」(Raymond A. Esthus, 1959)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에스더스는 형식적 측면에서 이 전문은 단순한 회담 보고서일 뿐, 태프트와 가쓰라가 서명한 협정이 아니며, 협정 체결은 육군 장관의 권한을 벗어난 국무장관의 업무 범위이므로 만일 태프트가 협정에 서명했다면, 그는 월권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오류에도 불구 국내 교과서 등재

자신의 논문에 대한 심각한 오류가 계속 제기되자 데넷은 추가 연구 끝에 최초의 주장을 철회하고 "태프트-가쓰라 대화를 밀약으로 해석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라고 발표했다. 자신의 오류를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이로써 서구 학계에서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1959년을 기점으로 모든 환상이 깨졌다(최덕규, 「"태프트-가쓰라 협정"에 대한 러시아와 한국 및 일본 역사교과서 서술 분석」, 『사회과교육』 제49집 제4호,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 2010, 67~83쪽).

미국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 데넷의 논문이 명백한 왜곡이란 사실을 밝혀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없었다는 사실을 밝힌 학자다.

국내에서도 1993년 이우진 중앙대 교수에 의해 에스더스의 논쟁이 소개되었고(이우진, 「러일전쟁과 한국문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8권 2호, 1993. pp.346-348.), 최덕수 고려대 교수에 의해 '태프트-가쓰라 비망록' 관련 자료들이 소개되었다(최덕수 외 지음,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열린책들, 2010, pp. 504-520).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서구학계에서 1959년에 '가짜'로 일단락 된 이 문제가 9년이 지난 1968년 국내 역사교과서에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1968년 이원순의 『문교부 검정 (인문계 고등학교) 국사』에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등장했는데, 그 내용도 서구학계와는 정반대로 "미국이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에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했다"라고 서술되어 있었다(이원순, 1968: 210).
이때부터 지금까지 국내 중고등용 역사교과서에는 여전히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신화가 건재하고 있으며, 협정조문까지 제시되어 실존했던 역사적 사실로 믿도록 만들고 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논문이나 자료,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내용도 이와 동일한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 결과 미국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긴 주범이라는 '역사적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제는 이런 가짜 역사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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