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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론새평] 늦깎이 꽃과 늦깎이 인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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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김승동

김승동 서울미디어대학원 특임교수
김승동 서울미디어대학원 특임교수

'어정 7월, 건들 8월, 동동 9월'이란 말처럼 가을의 길목에 접어들자 모든 게 바쁜 것 같다. 며칠 전까지 좀 길었던 해도 일찍 서산을 넘고 있다. 요즘 꽃가게마다 국화(菊花)를 진열대 앞에 내놓고 있어 행주산성 부근에서 사온 국화 화분을 들여다보며 누런 떡잎도 따주고 향기도 맡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꽃마다 특성이 있지만 국화는 신(神)이 제일 나중에 만든 꽃이라는 말이 있다. 꽃잎이 다른 꽃에 비해 비교적 많은 등 꽃 중에 가장 분화(分化)되고 진화(進化)된 모습을 띠고 있다. 국화는 어느 상황에서든 품격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때로는 도도한 여인처럼 차가운 모습이지만 그 꽃내음은 온몸을 감싸고 마음속까지 젖어 든다.

모든 꽃이 다 이쁘고 좋지만 국화에 남다른 마음을 갖는 것은 고등학교 때 청소년 적십자(Red Cross Youth·RCY) 단장을 하면서 매년 가을이면 노랗고 하얀 국화 화분 수백여 개를 전 학년 교실 복도마다 몇 개씩 갖다 놓는 등 학교 환경미화를 위한 봉사활동을 한 힘겨운(?) 추억 때문이다. 그 많은 화분을 꽃집이나 농장에서 사 오는 것이 아니라 100여 명의 RCY 단원이 5, 6월부터 손수 키워서 가을에 교실마다 배치하는 것이라서 여름방학 때도 국화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삼복더위에 단원들이 당번을 정해 학교에 나왔던 아스라한 추억이 있다.

흔히 늦게 시작한 사람들에게 '늦깎이'라는 말을 붙이나 사실 아무도 늦깎이는 없다. 가을에 핀 국화를 보고 '늦깎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벌써 대학마다 수시 접수를 하는 등 입시철인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수(再修) 삼수(三修)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필자도 그중 하나라 그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요즘은 대학뿐 아니라 취업 재수, 삼수생도 많은데 좀 뒤처졌다고 해서 조바심 가질 필요 없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볼 때 그깟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특히 100세 시대에는. 제때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는 것도 좋지만 좀 늦는 게 다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초가 더 튼튼해지고 더 여물어지는 것이다. 신이 큰 일을 맡길 때는 먼저 훈련을 시킨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에서 아직 그의 성적을 깨지 못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의 천재였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도 삼수생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도 영국 육사인 샌드허스트(Sandhurst)에 입학하기 위해 삼수를 했다. 성웅 이순신도 첫 과거 시험인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 시험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면서 탈락하는 등으로 과거 공부를 한 지 9년 만에 급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사법시험에 합격하기까지 9년이 걸렸다. 노무현은 사시 합격에도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법조계의 무시와 멸시로 설 땅을 찾지 못해 고향 부산에서 처음에는 당시 변호사들이 쳐다보지도 않던 부동산 등기 업무 등을 주로 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도 사법시험에 여덟 번 실패하고 아홉 번 도전한 끝에 합격했다. 그는 그야말로 '늦깎이 검사'로 비주류와 변방을 떠돌았다. 한때는 검사 사표를 내고 변호사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검사 25년 만에 검찰총장으로 발탁되고 마침내 정치 입문 9개월 만에 대통령이 됐다. 그가 대통령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국민이 부른 것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조국이나 이재명이 대통령이 돼 지금 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을 것이다. 그가 힘겹게 보낸 세월은 낭비와 좌절의 시간이 아니라 그를 더 폭넓고 굳세게 만든 훈련 코스였다. 하늘이 대한민국을 위해 윤석열을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하고 절차탁마(切磋琢磨)시킨 것이리라.

입시 수험생들이나 취업준비생들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되 혹시 기대에 못 미친 결과가 나오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삶이 망가질 정도로 좌절해선 안 된다.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서 각자 그 역할을 할 때가 올 것이다. 가을에 피는 국화는 봄꽃인 개나리나 벚꽃, 복숭아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꽃을 피울 적에도 나는 왜 이렇게 늦게 피나 한탄하지 않는다. 그저 햇볕과 비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자양분을 쌓고 자신이 꽃을 피울 차례가 올 때까지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늦깎이 꽃이 없듯이, 늦깎이 인생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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