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 연일초등학교는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다. 대한제국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전쟁과 현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거치며 터를 지켰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은 올해 2월 기준 1만6천여 명이다. 이곳에서 자란 인재들은 과거에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지금도 나라와 지역을 이끌고 있다.
연일초는 1906년 3월 11일 사립 광남학교로 개교한 뒤 1911년 10월 16일 연일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연일공립심상소학교, 연일공립국민학교 등 일제의 교육방침에 따라 이름을 바꾸다 광복을 맞았다. 국민학교 이름을 그대로 쓰던 1996년 3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면서 현재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 학교는 6·25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전쟁 당시였던 1951년 10월 17일 육군 제3875부대가 학교에 주둔하면서 학생들은 피난해 임시교실이나 노천에서 수업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긴 했어도 인민군 세력이 곳곳에 숨어 산발적 위협을 주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후 교착상태에 빠졌던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총성은 멈췄지만 군부대 주둔은 이어졌다. 1954년 9월에는 미군이 전쟁 피해를 입은 이 학교에 가교실 2칸을 준공해주기도 했다.
1955년 4월 20일 주둔 부대가 철수를 결정해 교사와 아이들이 4년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는 1970년 포항종합제철공장(포스코 포항제철소)이 들어서면서 부흥을 맞았다. 학생수는 급격히 불어 1960년대 1천100명 수준의 재학생이 1990년 1천836명으로, 2000년에는 57학급에 2천198명이나 됐다.
학교가 비좁아지자 분교를 시작, 연일형산초 등이 생겨났다.

이 학교에선 애국지사도 많이 배출됐다. 고(故) 이주호 선생이 대표적이다. 연일초 23회 졸업생인 그는 대구사범대에 재학 중인 1940년 11월 30일 학교 비밀결사 문예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문예부는 민족 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을 높이기 위해 조직됐고 구체적 운동 방침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대구시 대봉정 숙소에서 동료들과 항일결사를 다지는 다혁당을 조직해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는 방안을 토의하는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했다.
그러다 1941년 7월 일제 경찰에 적발돼 옥고를 치르는 등 고통을 당했다.
그는 1990년 애국지사 공로가 인정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2018년 4월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설암 박영곤 선생도 이 학교 출신 애국지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광남학교 시절 2회 졸업생인 그는 서울중앙고보,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인 포항시 남구 연일읍에 내려와 연일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30여 년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교편을 놓은 뒤에는 사재를 털어 '재건학원'을 세우고 공부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분필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주변에 "내가 죽거든 내 관 위에 태극기를 덮어달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애국심이 뛰어났다. 이 유지는 1966년 2월 20일 선생이 작고한 뒤 지켜졌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국내 방송과 언론 등을 통해 '일생을 교육에 비친 살아있는 상록수'라는 별칭으로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
이석수 연일초 총동창회 초대회장은 학교 100주년 기념사를 통해 "모교 출신들은 일제 때는 독립투사로, 6·25 전쟁 때는 학도병으로 참전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며 "이를 이어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준곤 교장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의 중심학교"라며 "학부모가 바라고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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