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두 개의 창

윤영 수필가(미니픽션작가)

윤영 수필가(미니픽션작가)
윤영 수필가(미니픽션작가)

방금 딸아이가 출근했다. 이제 객식구인 나와 낯가림 심한 뭉이뿐. 녀석의 행동거지가 궁금하다. 아니나 다를까. 행길로 난 작은 사각형 창문에 세워 둔 캣타워로 익숙한 듯 오르는 게 아닌가. 꽤 덩치가 있음에도 사뿐하게 말이야. 이내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을 앞발로 번갈아 가며 창을 긁는다. 방금 출근한 자신의 집사가 이때쯤 오피스텔 정문을 벗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창문을 열고서는 주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 거냐.' 속으로 놀라웠지만, 짐짓 모른 척 눈길을 두지 않았다. 시리다.

예약해 놓은 동대구행 KTX 시간을 확인하며 소공원과 맞닿은 장방형의 길쭉한 창을 열었다. 여름이면 4층 높이까지 자라 창문을 녹색으로 물들였던 은행나무는 말갛다. 계절마다 대체된 풍경이야 늘 있겠지만. 응달엔 바람에 흩날려 쌓인 눈더미가 군데군데 쌓였다. 하늘에 철길을 낸 듯한 전선들이 사방으로 덮인 목동의 겨울 소공원은 단조롭다 못해 적적하기까지 하다.

평일 아침 공원 한켠에 앉은 중년의 사내. 온몸으로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꼼짝을 않는다. 추위에 무뎌진 겐가. 갈색 코르덴바지에 남색 후드점퍼가 남자를 단단히 감쌌지만, 훤한 정수리가 살얼음 낀 연못이다. 돋아날 새싹도 일렁이는 풀잎도 그렇다고 스멀스멀 피어오를 아지랑이도 없는, 언 땅을 왜 그리 쳐다보고 있을까. 혹여 기적과 낙원의 시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0초 동안 잠깐 명퇴, 연금세대, 독거노인 이런 단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 나에겐 낯설지만, 그에게는 지극한 일상의 패턴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순간 고개를 든 사내와 눈이 맞았다. 하긴 좀 쉬고 싶었을지도. 나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커튼 뒤로 움츠린다.

여전히 사각 창에 기대 몽상가가 된 뭉이. '내 고향은 탱자나무 울타리 숲 같은 여기가 아니야.'라는 시큰둥한 얼굴. 이따금 꼬리를 감고 앞발을 당겨 핥는다. 행길로 지나가는 사람, 전봇대를 휘감는 바람, 선회하던 새떼 무리에 쓸데없이 발길질이다. 사실, 뭉이는 딸아이가 7년 전 어미 잃은 새끼를 데려와 이름을 지어주며 키운 길고양이다.

같은 시각 공원을 품은 언덕배기 빌라촌 위로 햇살이 도둑가시처럼 다닥다닥 박혔다. 햇살이 불편하다. 두어 시간은 지나지 않았을까. 사내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당겨 정수리를 덮는다. 보도블록 틈을 쪼아대던 예닐곱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오르자 사내도 일어났다. 멀거니 알몸의 잔가지 사이로 유리창을 훔치고선 십자가도 없는, 교회 간판만 덩그렇게 붙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두어 번 하악질 하던 뭉이도 무료한지 나를 멀끔히 쳐다본다. 공격의 대상이기엔 힘없어 보였을 중년 여인. 쓸데없이 타인의 삶을 추측하지 말라고. 잡다한 그대의 삶이나 단정히 하고 하던 화장이나 마저 하고 당신 집으로 돌아가라는 눈빛.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배를 납작 깔아 가로 눈을 하더니 웬걸 잠에 빠졌다.

이처럼 창이라는 공간은 끊임없는 상상력을 투사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데려오고 데려갔다. 물론 둘은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몸소 체득했을 테고. 그러고선 간단없이 창문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안팎을 전환하며 내게 '자기 승화'를 던진 것은 아닐는지. 안에서 밖을 보는 뭉이와 밖에서 안을 보고 있던 사내. 누구든 어디서든 타인의 삶은 궁금한 모양이다. 설령 창문이 사라진대도 마찬가지일 거야. 없어질 것들은 없어지고 영속할 것은 영속하며 균형에 닿을거라는 단순한 이치가 새삼 고맙다.

두 개의 창문을 닫아걸었다.

"뭉아 안녕. 이 객식구를 데려다줄 카카오 택시가 도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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