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박수치기 전에 떠나라

오정일(경북대 교수·한국정부학회장)
오정일(경북대 교수·한국정부학회장)

정치적으로 큰 판이 벌어진다. 내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야당에서는 '전대협 86세대'와 '한총련 97세대'가 부딪치고 있다. 여당 간판은 김기현(64) 의원에서 한동훈(50) 전 장관으로 바뀌었다. 이 와중에 '올드 보이'(old boy)들이 여기저기 얼굴을 내비친다. 때가 되니 각설이가 또 왔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겠는가.

야당을 보자. 국회의원 4선,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 A(81) 씨와 국회의원 6선, 법무부 장관을 지낸 B(69) 씨가 출마한다고 한다. 국회의원을 4번 지냈고 대통령선거 후보였던 C(70) 씨도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이례적(異例的)으로 국회의장과 국무총리를 모두 맡았던 D(73) 씨와 여야를 넘나들며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를 지낸 E(66) 씨는 정치 활동을 재개(再開)했다.

여당도 '도긴개긴'이다. 국회의원 6선이자 경기도 도지사를 지냈고, 대통령선거에 2번 나왔던 불사조 F(75) 씨가 또 출마한다. 국회의원 5선인 G(64) 씨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구를 옮겼다면서 초선(初選)이라고 말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농담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H(61) 씨는 서울에서 부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하방(下放)해서 대구시장을 2번 지냈다. 몇 년 전 비장한 얼굴로 대구시장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다.

공부를 마친 '올드 보이'들은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새로운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온다. 정치판에서는 '올드 보이'들이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지 못한다. 이들은 나라 걱정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언제나 위기 상황이다. 늘 단군 이래 최대 위기다. 때만 되면 '혁신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툭하면 '비상대책위원회'가 가동된다. '올드 보이'들에게는 약간의 과대망상(誇大妄想)이 있다.

나는 유능하다. 내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 세상이 나를 부른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선다. 다른 사람들은 출세를 위해 나서지만 내가 나선 것은 '고뇌(苦惱)에 찬 구국(救國)의 결단'이다. '올드 보이'들에게는 '나르시시즘(narcissism)'도 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알고 좋아한다. 나는 유명하고 인기가 많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 예외다. 그래서 계속 정치를 해도 된다.

사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간다. 잠시라도 외국에 나갔다가 온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한 정치인은 우리나라 정치를 만원(滿員) 버스에 비유했다. 버스에 사람이 꽉 차서 견디지 못한 사람이 내리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있던 자리를 차지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대체로 남들이 못 하는 일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해내려면 탁월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 천재는 10만 명 중 1명꼴로 나타난다고 한다. 내가 특별히 유능한 사람일 확률은 0.001%로 매우 낮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많은 사람이 알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남 일에 관심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 10명에게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국방부 장관 이름을 물어보면 몇 명이나 알까? 당신이 이름을 아는 대법관은 몇 명인가? 국회의원 300명 중에 내가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본 의원은 100명이 채 안 된다. 나는 대구시 행정부시장이나 경제부시장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정부든 국회든, 검찰이든 법원이든 '그들만의 리그(league)'일 뿐이다. 얼굴에 분칠하고 광대 노릇을 해야 유명해진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예외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다.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있다. 더 할 일이 없으면 사라져야 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떠나야 한다. 박수칠 때 떠나면 이미 늦었다. '박수'는 그만하면 됐으니 떠나라는 뜻이다. 박수치기 전에 떠나야 한다. 떠나라고 해도 안 떠나는 사람, 떠났다가 돌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다. 노욕(老慾)을 넘은 노추(老醜)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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