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하이든, 하인에서 사업가가 되다

금동엽 문화경영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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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제복을 입고 궁정에서 봉사했던 하인이기도 했다. 이는 친구에게 보냈던 하이든의 편지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편지에서 "내가 궁정악장이 맞는지 아니면 궁정하인인지 잘 몰랐었네. 근데 실제로는 노예라고 불려야 맞네!"라고 했다.

하이든은 1732년에 헝가리와 국경을 마주한 오스트리아 로하우의 가난한 마차 제작자였던 아버지 마티아스와 귀족 가문의 요리사였던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이든의 가문에는 전문 음악가가 한 사람도 없었지만, 하이든은 놀랄 정도로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어느 날 마티아스의 사촌인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가 하이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는, 자신이 사는 하인부르크로 데려가서 더 나은 음악교육을 받도록 하자고 했다. 어머니 마리아는 어린 하이든이 집을 떠나 멀리 가는 것에 주저했으나, 결국 여섯 살의 어린아이는 부모의 곁을 떠났으며 그 뒤로 잠깐씩 집에 왔다 가곤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하이든은 그 어린 나이에 영원히 가족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하이든은 평생 자신을 떠나보낸 어머니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항상 어머니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말했다.

약속과는 달리 하이든은 하인부르크에서 음악 공부와 연습에 더해 프랑크의 집안일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여덟 살에는 빈의 성 스테판 성당의 합창단원이 된다. 그러나 빈에서의 삶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갖은 고생으로 이어진 삶을 살다가, 29세가 되던 1761년에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 부악장으로 되면서 비로소 안식처를 얻게 된다. 당시에는 음악을 교환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음악가들의 수입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가 전부였다. 따라서 하이든도 다른 하인들처럼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생계를 해결하는 셈이었다. 실제로 그의 업무는 하인의 일과 다름이 없었다. 하이든은 하루 중 특정한 시간에 규정된 옷을 입고 고용주인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지시를 받으러 갔으며, 그의 취향을 반영해 작곡했고, 온갖 계약 사항을 따라야 했다.

공작이 사망하자 하이든은 30년 만에 궁정악장에서 프리랜서가 된다. 그리곤 음악 흥행가였던 요한 살로몬의 도움으로 런던으로 가서 뛰어난 작곡가이자 사업가로 변신했다. 초기의 가난과 프리랜서 음악가로서의 어려움은 거래에 있어서 하이든을 기민하고 빈틈이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는 작품의 판매와 관련해 협상하거나 출판사와 계약을 할 때 수입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런던과 빈에서 사업을 했지만, 그는 다른 나라의 여러 출판사와도 동시에 계약을 맺기도 했으며, 또 이미 판매한 작품이 출판되기 전에 몰래 다른 개인 구매자들에게 팔려고도 했다. 이런 사업 관행은 당시에는 사기로 인식될 수 있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사업은 저작권에 관한 주춧돌을 낳은 셈이며,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을 위한 전형이 됐다. 그는 두 번의 영국 방문을 통해 에스테르하지 궁정 악장의 20년 치 급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음악가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궁정 하인으로서의 하이든이 부러울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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